가치 있는 삶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시간이 지나간 자리 관찰하기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꾸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 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꽃들이 피거나 폐허가 되거나 돌이 굴러 와 뿌리를 내리거나 할 것이다. 관찰하면 신비롭다. 살면서 무수히 겪게 되는 별의별 일들, 소소하든 대수롭든 그것을 통과한 신체는 변화를 겪는다. 이 같은 일상의 풍경과 생각과 느낌이 별처럼 은은히 차오를 글은 구체적인 '한 사람'을 선명히 보여준다. 그럴 때 그 글이 다른 이의 경험이나 감정과 겹치고 공감을 낳는다. '남'의 글에서 억눌러놓은 '나'를 보았을 때, 미쳐 몰랐던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라고 느낀다. 고마워한다. 내가 게을러서 혹은 두려워서 아니면 막막해서 미쳐 들쳐보지 못한 마음의 자리를 누군가 살뜰히 드러내주면 덩달아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무엇이 한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까. 그 사람은 왜 거기에 있을까. 의사나 판사, 연예인같이 돈이나 명예나 보상이 따르는 인기 직종에 관해서라면 정보가 넘친다. 당사자가 직접 책을 써서 알리거나 매스컴에서 그들의 삶과 일을 조명한다. 사회적으로 소위 '성공'한 이들의 정보는 차고 넘치는 반면, 영화스태프나 장애인 야학교사나 비전향 장기수, 경비원 등 수입이  높지 않은 이들, 일부러 찾으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집단적으로 무시한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의문이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세상의 풍경들, 예를 들면 엄마가 매일 일어나 밥하는 일, 마트 종업원이 기계적인 인사를 건네는 일, 괜히 싫은 감정이 드는 것 등 상황과 감정에 집중하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 다시 물음표가 된다. 내가 이렇게 믿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만의 사유를 낳는다.



짧은 문장이 무조건 좋을까: 단문 쓰기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의 문장 만들기. 이는 독자만이 아니라 필자에게도 이롭다. 글쓰기는 생각 쓰기다. 머릿속 생각을 구체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문장이 길면 생각이 엉키고 문법이 틀리기 쉽다. 주어와 동사는 연인이다. 가까이 있게 하라, 는 말이 있다. 문장이 길수록 주술 관계가 어긋나기 쉽다. 문장이 간소해야 내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갔는지, 빠진 부분은 무엇인지, 부연할 요소는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일전에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을 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부했다는 연설문의 원칙에는 단문 쓰기가 강조되어 있었다.

  "한 문장 안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언급해주게. 헷갈리네." 문장은 자를 수 있으면 최다한 잘라서 단문으로 써주게. 탁탁 치고 가야 힘이 있네."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글쓰기의 최대 적이네."


  아마도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시중에 나온 거의 모든 글쓰기 책이 단문을 권유하고 긴 문장을 글쓰기 최대의 방해 요소로 간주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서가 있다. 단문 쓰기는 훈련의 어느 단계까지에 해당하는 비법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 수업에서 가끔 '단문 쓰기' 신공을 펼치는 학인들을 본다. 단문의 빠른 전개는 속도감 있게 잃기지만 때로 너무 끊어져서 이야기가 시작되다 끝나버리는 허무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낭독해보면 금방 안다. "지금은 삶이 내 것인지 두렵다" "사람을 만날수록 외로워졌다" 같은 경우처럼 "~했다" "~이다"라는 문장이 잇달아 나오는 글은 흐름이 탁탁 끊겨 이야기가 흩어진다. 복잡한 장과 마찬가지로 앙상한 문장도 메시지 수용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은 길고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유럽권 작가는 거의가 만연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밀고 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오랜 시간 형성된 지적 풍토와 문화에서 형성된 문체가 아니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꼬리가 긴 글에 어려움을 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짧은 문장이 선이고 긴 문장이 악이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문장의 길이가 좋은 글을 가늠하는 절대적 척도라는 건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글쓰기에서는 좋은 문장이 있고 덜 좋은 문장이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대체로 간결하고 재미있고 친절하고 유익할 때 좋은 문장으로 본다.


  문장이 길든 짧든 나는 이런 글이 좋다.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놓는 글. 하나의 메시지나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문 쓰기가 글쓰기를 여는 문이다.








글 쓰는 신체로: 베껴 쓰기

  베껴 쓰는 동안은 책상에 앉아 있으니 책상과 한 몸 되어 무엇을 생산해내는 기쁨 체험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렇게 모은 글, 금쌀처럼 귀한 나의 일용할 양식을 담은 노트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창가에 턱 괴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잠을 청하면서 '노트'를 훑는다. 화분에 물을 주듯이 그것들에 눈길을 붓는다. 이티와 소년처럼 손끝을 맞대고 있다. 

  베낄 당시엔 큰 감동을 준 단어가 시시해져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다시 보아도 감동이 물결치는 문장이 있어 형광펜을 긋기도 한다. '매일 매일 조금씩'의 위력은 참으로 크다. 신체에 각인된 그 문장, 단어, 금언, 감각, 뉘앙스, 느낌, 향기, 리듬, 파장이 글을 쓸 때면 슬며시 되살아남을 느낀다. 

  영감을 주고 논지를 잡아준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살짝 비틀어 재활용하는 것만으로 밋밋한 글에 활기가 돈다. 베껴 쓰기는 정신에 군불을 대주는 일용할 땔감이다. 배껴 쓰기는 그러니까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 록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핸드릭스의 연주법을 따라 해보는 것과 같다. 철학자 김영민은 모방의 필요성에 및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방은 물듦이다.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 속에 있다. 그러나 착실하게 모방의 길을 걸어보지 못한 자라면 냉소마저 허영일 뿐이다. 가령 프로이트에 충실한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라캉에 충실한 지젝의 생산성이 그러하지 않던가."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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