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에서,,



<빌게이츠 추천>



오늘 소개드릴 책은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입니다. 지난 포스팅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책 소개를 하는 방법은 독후감이나 서평이 아닌, 책 내용중 감명 깊었던 문장이나 단락을 포함된 한 '꼭지'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아직 서평을 작성할 만큼 글쓰기 실력을 갖추지 못한게 가장 큰 이유지만, 또 다른 목적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포스팅 하고 블로깅할 예정입니다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서두부터 늘어놓아서 조금 민망하지만, 아무쪼록, 앞으로도 '김찌의 가치 있는 삶' 블로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산_데이비드 브룩스》

Chapter 5. 자기 인생에 귀 기울인다는 

모세의 길

고통의 시기에 대한 통상적인 반응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상황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치료한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슬픈 음악을 듣는다든가 하는 시도 말이다.

  고통의 순간에 놓여 있을 때 해야 할 올바른 일은 고통 속에 똑바로 서는 것이다. 기다려라.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보라. 그리고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처리되기만 하면 축소가 아니라 확장으로 인도해 줄 어떤 과제임을 깨달아라.


  계곡은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름길은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인들이 묘사해 왔던 동일하고 영원한 세 단계의 과정, 고통에서 지혜로 그리고 다시 봉사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낡은 자기를 죽이고, 텅 빔 속에서 깨끗이 씻고, 새로움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계곡의 고뇌로부터 사막의 정화를 거쳐 산봉우리의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여행을 어떻게 시작할까? 다행히 사람들은 이것을 놓고 수천 년 동안 생각해 왔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몇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어린 모세는 자기 인생에 대한 생각을 막 시작했다. 그는 파라오 왕궁에서(아주 곱게) 성장했지만 어떤 도덕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압제를 증오했으며, 유대인 노예를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의 이 작은 반란은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모세의 그 행동은 무작위적이고 무절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패배자가 되어 이집트에서 달아나야 했다. 심지어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눈에도 패배자로 비쳤다. 모세는 혼자가 되어 길을 떠났다. 그는 자기 양 떼를 몰고 '멀리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모세가 랍비의 전통에 따라 사막에 있을 때 작은 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달아났고 그는 양을 쫓아갔다. 보통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데리고 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양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도 아니고 또 원래 있던 곳에서 멀리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양이 마치 가젤처럼 빠르게 달렸던 것이다. 모세는 양을 쫓아서 광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지만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양은 저만치 앞에서 계속 내달렸다. 그러다가 샘이 있는 곳에서 물을 마시려고 멈춰 섰고, 마침내 모세는 양을 붙잡았다. 

  

  그 양은 물론 모세 자신이다. 모세는 숨어 있었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이슬람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에는 "나는 숨어 있는 보물이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모세는 광야 깊숙한 곳으로 멀리 나아가야만 했다. 또 거기에서도 더 깊숙히 비어 있는 곳으로 길 잃은 양을 쫓아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만났다.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에 가장 똑똑한 선택은 수백만 명이 역사 속에서 했던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추스르고 일어나 홀로 광야 속으로 들어가라.

  전혀 다른 물리적인 장소로 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새로운 존재 방식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의 길을 맛보고 만지고 느낄 필요가 있다. 중심지를 떠나 변방으로 가는 데는 많은 이득이 뒤따른다.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헨리 나우웬은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특이한 시간을 통해 살고 있다. 당신은 고독, 기도, 은둔 그리고 위대한 단순성으로 나아가라는 소명을 받았음을 깨닫는다. 당신은 한동안 전화 통화를 자제하고 편지 쓰기에 조심하는 등 움직임을 제한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친구, 바쁜 일과, 신문 그리고 재미있는 책 등을 멀리해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는 당신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죽어 가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나고 있음은 명백하다. 당신의 주의를 집중하고 차분한 상태로 당신이 가진 최고의 직관에 복종해야 한다."








  광야에서는 인생의 산만한 것들이 모두 제거된다. 이때의 인생은 조용하다. 이곳에서는 규율과 단순성과 치열한 주의 집중이 요구 된다. 광야에서의 고독은, 개인의 인격 속에 복잡하게 녹아들고 있고 사람을 즐겁해 해 주는 모든 습관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벨든 레인은 《성인들을 배낭에 넣고서》에서 이렇게 묻는다.

  "만일 '재능 있는 어떤 아이'가 자기 가치를 증명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자기에게 박수를 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냉담하기만 한 침묵의 무관심과 마주할 때, 과연 그 아이는 무엇을 할까? 그 아이의 세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찬 아이의 영혼은 광야의 사막에서 굶주린다. 광야는 그 강박적인 성취자를 작고 매우 평범한 어떤 존재로 쪼그라뜨린다. 오로지 이럴 때만 비로소 그 아이는 사랑받을 수 있다.


  광야에서의 고독은 시간과 관련된 경험을 바꾸어 놓는다. 평범한 인생은 평범한 시간 속에서, 즉 출퇴근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시간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광야는 그리스 사람들이 "카이로스 시간"(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으로 제우스의 아들이다-옮긴이)이라고 부르는 것의 속도로 살아가는데, 이 시간은 더 느릴 수 있지만 언제나 더 풍성하다. 동기화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것이다. 시의적절할 수도 있고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풍성할 수도 있고, 성길 수도 있으며, 고무된 것일 수도 있고 밋밋한 것일 수도 있는, 요컨대 혼잡한 시간일 수도 있고 텅 빈 순가일 수도 있다. 누구나 광야에 나가서 여러 주 동안 있다 보면 저절로 카이로스 시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광야에서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영혼 역시 마치 붉은 삼나무가 성장하는 것처럼 느리고 고요하지만 두텁고 강력한 시간인 카이로스 시간에 맞춰진다.


  광야에서 보내는 삶의 척박함은 당신이 자기 자신과 친밀해질 수 있도록 준비해 준다. 때로 이것은 그동안 숨어 있던 고통을 낱낱이 드러내 준다. 과거에 겪었던 실패나 슬픔의 뼈아픈 기억이 있을 수 있다.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을 수 있다. 이 상처들에서 비롯된 자신의 나쁜 행동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구 몰아붙이는 습관이나 누구로부터 버려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향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움츠러드는 태도 같은 행동들이다. 헨리 나우웬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의 고통은 깊으며, 이 고통을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고통은 또한 오로지 당신에게만 특이한 것인데, 당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어떤 경험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소명은 이 고통을 철저하게 느끼는 것이다. 당신의 상처 부위가 당신의 성인 자아에게 낯선 것으로 남아 있는 한 당신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당신에게도 상처를 입힐 것이다."

  속담에서 말했듯이 변치 않는 고통은 전염된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에서,,



<좋은 책>


'광야로 나아가라'는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광야는 '자기의 길'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자체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광야'는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 떠나는 '영혼의 여행길'로 받아들였습니다.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의 시작과 끝은, 고통을 직시하면서 '현재 나는 고통스럽다. 지금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치유하지 않고, 회피하여 현재의 고통을 덮어버리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창고에 보관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의식의 창고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이 중에서 '과거의 고통'은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현재 시점의 고통이 잘 머무를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써 줍니다. 새로 들어온 이 신참은 언제고 다시 세상(의식)으로 나가서 새로운 '고통동료'를 데리고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내려놓아 해결하지 못하고, 덮어버리거나 잊기 위해서 일으킨 갈애와 욕망, 쾌락은 차후에 훨씬 더 큰 고통으로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즐거운 일보다는 고통스러운 일을 더 크게 생각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만족과 쾌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불안한 상태, 알아차리고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상태에서 어떤 것을 갈구하여 그것을 얻어낸다고 한들, 그것이 바람직하거나 합리적인 결과일 수 없습니다. 결국, 해결하지 못한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이어져 인생 전체가 고통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광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과거와의 결별을 뜻하기도 하고, 고통에 지쳐 쓰러진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노력이면서 더 나은(바람직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내딪는 한 걸음이 쌓여 이르게 되는 곳이 바로 '자신만의 광야'입니다. 


'자신만의 광야'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은 세상이 만들어낸 것도 타자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고통과 잘못된 신념,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스스로 운명속에 가두어진 꼴입니다. 즉, 자신을 만나러 떠나는 여행을 방해하고 제한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광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광야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길'과도 같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길은 '고유한 나'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고 출발점이며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첫 걸음입니다. 


오늘 내딪는 첫 걸음으로 인해 진정으로 삶의 주인이 된 당신은 이제 더 큰 세상을 향해 더 큰 한 걸음을 옮길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못 살아?"라고 하는 우주의 핀잔에 가장 적절한 대응이면서 우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가장 확실한 보답 중 하나입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에서,,



당신 인생에 귀 기울이기

광야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받아들이고 찬찬히 검토하는 방법을 배운다. 작가이자 신학자인 프레더릭 비크너는 이렇게 썼다

  "만일 내가 지금까지 소살가와 목사로서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몇 마디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인생에 귀를 기울여라'이다. 있는 그대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찾아서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라. 흥분과 기쁨의 인생만이 아니라 따분함과 고통의 인생도 바라보아야 한다. 인생의 성스럽고 숨겨진 핵심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길을 더듬고 맛보고 냄새 맡아라. 결국 모든 순간들이 핵심적인 순간들이고, 인생은 그 자체로 은총이기 때문이다.


  교육가이자 영성 작가인 파커 파머Parker Palmer도 바로 이 주제를 환기시킨다.

  "이십 대 초반 무렵 나에게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지금까지 특별하고도 치명적인 실패를 저질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지 인류가 함께 꾸려 가는 어떤 여정에 뛰어든 것일뿐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파머에게도 인생의 핵심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려고 한다거나 어떤 추상적인 규범에 맞춰서 인생을 사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뿐더러 커다란 피해까지 초래한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통제하려는 행위를 통해서는 자기 직업을 찾지 못한다.

  "직업은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비롯된다.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어떻게 되면 좋겠다는 자기의 바람과는 완전히 별개로) 그것이 진정으로 어떠한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피트 웨너라는 내 친구는 남의 말에 놀라울 정도로 귀를 잘 기울인다. 내가 어떤 문제를 얘기하면 그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다. 너덧 가지 질문에 내가 대답하면서 잠시 대화가 이어지고 나면 나는 그가 무어라 자기 의견을 말해 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웬걸, 그는 다시 일고여덟 개의 질문을 더 던진다. 이 질문들에 내가 대답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조언을 내놓는다. 다른 사람의 말이든 자기 내면의 말이든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추가 질문이 포함되며, 이때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범위를 초월해 확장된다.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끈기를 가진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성숙하지 않은 태도로 평가하며 보낸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맞닥뜨리는 순간 즉각 자기 마음을 결정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한 번 어떤 판단을 내려 분류에서 정리해 버리고 나면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더는 복잡한 온갖 요소를 고려하면서 다시 살피려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 광야는 우리에게 소극적 수용 능력, 불확실성 속에 머무는 능력, 성급히 미숙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능력을 가르친다.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질문을 한다는 뜻이다.

  -내가 지금까지 잘한 일은 무엇일가? 내가 지금까지 못한 일은 무엇일까? 보수나 대가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또는 기대한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까?



더 깊은 자기를 만나는 시간

광야에 있으면 자기 자신의 더 나은 버전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벨든 레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큰맘 먹고 광야에 나섰을 때 나는 혼자 있는 것을 내가 얼마나 즐기는지 몰랐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와 동행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성취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는 반짝거리는 개성을 다른 사람드에게 흩뿌리려고 애를 쓴다. 캘리포니아의 벨마운틴 정상에 있는 떡갈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일지에 휘갈겨 쓸 때 나는 종달새처럼 행복하다. 나는 광야에 혼자 있을 때의 나인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은 중요한 어떤 계시의 시작점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 에니 딜러드는 《돌에게 말하는 법 가르치기Teaching a Stone to Talk》에서 이렇게 썼다.

  "심리학자들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폭력과 테러는 깊은 곳에 잠겨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괴물들을 더 깊은 곳으로 몰아놓는다면, 만일 당신이 이 세상의 가장자리 끝에서 이 괴물들과 함께 떨어진다면, 우리늬 과학이 포착하거나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무지 다른 것들을 표면으로 붕붕 뜨게 만들며, 선함에 선용할 힘을 주고 악함에 악용할 힘을 주는, 태양 또는 매트릭스 또는 에테르, 통합된 어떤 장이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보살피는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어떤 마음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책 내용 전체를 이것으로 요약할 수 있늘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인생의 표면에 딱딱한 껍질을 만든다. 이 껍질은 두려움과 불안정함을 숨기고 남에게 인정받고 성공을 거두기 위한 것이다. 당싱이 자기 자신의 핵심으로 다가간다고 치자. 이때 당신은 전혀 다르며 훨씬 더 원초적인 어떤 경지를 발견할 것이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발견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 깊은 핵심을 '플레로마pleroma'(충만)라고 부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당신의 심장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


  캐서린 블라이 콕스라는 내 친구는 첫딸이 태어난 뒤 나에게 말했다.

  "나는 진화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내 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녀가 했던 이 말, 그녀의 이 통찰이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한층 더 깊은 저 아래 어떤 층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물질적인 즐거움으로 내모는 것들이 있고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도록 내모는 진화의 힘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경제학과 정치학, 진화심리학이 관장하는 인생의 층들이다. 그러나 이 층들은 샤르트르대성당이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감옥에 갇힌 넬슨 만델라, 전쟁 상황실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우리가 사랑의 격렬함과 충만함을 느낄 때 이 심리적·정서적 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광야에서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그 층이다. 이것은 우리더러 두 번째 산에 오르라고 등을 떠미는 용수철 같은 활력이다. 만일 당신이 이 깊은 원천을 건드렸다면 당신은 자신의 자아를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만들기 시작한 셈이다.


  당신의 자아는 오랫동안 헨리 나우엔이 "이상적 자아"라고 부른 특정한 길, 즉 당신이 남들에게 최고로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길을 찾아 왔다. 이 자아는, 당신이 똑똑하고 멋있고 존경스러워 보이게 만들 어떤 역할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아마 지금까지 당신은 이 이상적 자아를 맞춰 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의 자아는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예측 불가능성의 놀라움보다는 예측 가능성의 안전성을, 모호함보다는 명료함을 선호한다. 당신의 자아는 들릴락 말락 하는 마음의 웅얼거림을 언제나 덮어 버리고 싶어 한다.


  이 자아는 당신이 남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마법의 지팡이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일자리나 인생을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리 하디Lee Hardy는 말한다.

  그와 달리 당신의 자아로서는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인생을 당신이 감지하는 것은 바로 이 깊은 단계에서이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꽃의 향기, 우리가 듣지 못했던 어떤 곡조의 울림,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어떤 나라의 소식"을 감지하는 무언가가 당신의 내면에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포기의 첫 단계, 새로운 자아가 떠오를 수 있도록 낡은 자아를 버리는 단계에 있다. 당신이 자기의 이상적 자아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당신의 심장과 영혼을 진정으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에서,,



<두 번째 산>


  

자아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 모든 관점과 편견, 선입견을 겉어 내고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 입각한 '행복한 이기주의자'로 살겠다는 의지를 넘어 진정으로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기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애와 연민'입니다.


'자기 헌신'없이 타자와 세상에 헌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자기 사랑'없이 타자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자애와 연민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그곳에 내 사랑이 필요함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온갖(정보, 지식, 관념, 개념, 이념, 사상 등) 것들을 여과없이 받아들입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을 똑같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이 중에서 왜곡된 사실은 걸러내고 참眞된 진리만을 바깥 세상에 내보내려고 노력합니다. 



《두 번째 산_데이비드 브룩스》

개인주의를 넘어 관계주의로

관계 중심 세계관을 위하여

  첫 번재 산은 개인주의 세계관으로 자아의 욕구를 중심에 둔다. 이와 달리 두 번째 산은 관계주의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인간관계와 헌신 그리고 심장과 영혼의 욕구에 중심을 둔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주장의 핵심은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주의 세계관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강조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라고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속한 사회를 갈가리 찢어 버렸고, 사회의 분열과 부족주의가 팽배하게 만들었으며, 개인적인 지위와 자족의 원리를 숭배하게 되었고, 또 각 개인의 심장과 영혼 속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덮어서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중략······


  인생은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는 가장 적당한 크기로 쪼그라든다. 인간관계가 부드러울 때, 헌신이 강력할 때, 의사소통이 순수할 때, 인생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잘못된 것들이 용서받을 때,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구부러져 서로 밀접하게 얽히고, 그리하여 거기에서 어떤 신비로운 불타오름이 일어난다.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서, 무로부터 찬연하게 피어오른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불꽃으로,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에서,,



두 번째 산
국내도서
저자 :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 이경식역
출판 : 부키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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