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고통이 뭐야? 알아보고, <깨나의 명상 86, 87일차>함께 보기!




명상 84, 85일차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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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는 영혼』

제 11장 

고통의 층 너머로 가기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가슴속에 고통이 있음을 받아들여라. 당신이 그것을 거기다 쌓아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도록, 거기서 깊이 묻혀 있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했다. 당신 안에는 또한 엄청난 환희와 아름다움과 사랑과 평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건너편에 있다. 고통의 건너편에는 황홀경이 있다. 자유가 있다. 당신의 진정 훌륭한 면들은 고통의 층들 건너편에 숨겨져 있다. 그 건너편으로 지나가기 위해서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저 고통이 거기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느껴 보리라고 마음먹으면 된다. 힘을 빼고 이완하기만 하면 그것은 당신의 의식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가지다가 지나갈 것이다. 그것이 이치다. 


  때로는 고통이 지나가는 동안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실 고통의 에너지 속으로 이완해 들어가면 가슴속에서 엄청난 열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이 가슴으로부터 정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뜨거운 느낌을 즐기도록 하라. 그것은 '요가의 불'이라고 불린다. 별로 즐김직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당신을 해방시켜 주므로 결국은 즐기게 될 것이다.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각오가 다져지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고통을 겁내지 않는 순간, 당신은 삶의 모든 상황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대면할 수 있게 될것이다.


  때로 내면에 강렬한 고통을 주는 진한 경험을 겪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안에 있으면 언젠가는 올라올 것이다. 당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삶을 바꾸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힘을 빼고 이완하여 그것이 풀려나서 당신을 태우고 지나가도록 공간을 내주지, 그것이 가슴속에 죽치고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크나큰 사랑과 자유를 느끼려면, 자기 안에서 신의 임재를 발견하려면, 쌓여 있는 이 모든 고통이 지나가야 한다. 이 내면의 작업 속에서 영성이 현실로 변한다. 자유의 대가를 의식적으로 기꺼이 지불할 각오가 되는 순간 속에 영적 성장이 있다. 당신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고통을 직면하여 깨어 있는 의식으로써 가슴을 이완하여 엶으로써 기꺼이 내적 작업에 임할 수 있다.


  명심하라, 어떤 것의 주위를 차단하여 가두어 놓으면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은 그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내면에 가두어 놓았으니, 그것이 다시 일어날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가두어 두지 않고 이완하면 그것은 당신을 지나갈 것이다. 가슴을 열고 있으면 내면에서 차단된 에너지는 절로 풀려나서 다시는 그것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적 수행의 요체이다. 고통이 자신을 지나가는 것에 편안해지면 당신은 자유를 얻는다. 이 세상이 당신을 결코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이 당신 속에 쌓여 있는 고통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상관하지 않으면, 자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유롭다. 그러면 당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힘차게,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경험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당신은 이 모든 두려움과 고통 뒤에 사랑의 대양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힘이 가슴 깊은 곳에 자양분을 주어 당신을 부양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당신은 이 아름다운 내면의 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쌓아갈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지금 내적 고통과 혼란과 맺고 있는 관계를 대체할 것이다. 이제 평화와 사랑이 당신의 삶을 이끌어갈 것이다. 고통의 층을 통과하면 당신은 마침내 마음의 구속에서 해방될 것이다.









고통이 뭐야? 알아보고, <깨나의 명상 86, 87일차>함께 보기!



고통苦痛은 몸과 마음이 괴롭거나 아픈 것을 뜻합니다. 우리 인간중에서 고통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으며, 고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 또한 찾기 힘듭니다. 말 그대로 고통과 인간은 땔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마음 상태인 '행복'을 불행하지 않은 마음 상태라고까지 부르겠습니까!


  불행하지 않는 것이 곧 행복이라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불행에 대해서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실제로 그러한(불행한)것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 '해로운 감정 상태'를 경험하고 있거나, 그렇다고 믿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불행'은 없고 불행하다고 믿고, 느끼고, 생각하는 '불행한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불행을 '마음이 경험하는 해로운 감정'으로 정의한다면, 당연히 '해로운 감정'에 대해서도 알아야만 합니다. 해로운 감정(이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유익하지 않은 마음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걱정과 불안', '고통과 괴로움', '두려움과 무서움'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유익하지 않은 마음이 무명이나 무지, 쉬운말로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해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실제로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리고 믿는) '원인'인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해로움을 해로움이라고 모르고 유익함을 유익함이라고 알지 못하고 그것들이 일어나는 조건들을 모르는 것입니다. 진리나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면(알지 못하면) 어떠한 주의를 기울이냐에 따라 해로운 마음과 유익한 마음이 결정되는 것이지 대상 자체가 즐거운 것이나 불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로운 마음과 유익한 마음은 경험하고 있는 대상이나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결정하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는 살면서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기도 하고 불쾌한 대상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만약 불쾌한 대상을 경험한다면 실망하고 슬퍼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안, 고통,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기는 커녕 회피하기에만 급급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든(지금부터는 주제에 맞게 고통중에서도 마음의 괴로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물질에서 기인한 괴로움이든, 원인이 무엇이었든지간에 회피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괴로움을 덮을 수 있는 강한 자극의 대상을 찾습니다.

  아무리 강한 자극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강도는 약해지면서 불안이 쌓여갑니다. 또 다른 자극을 찾지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쌓인 불안함과 불편함은 급기야 괴로움으로 확장되어 "어떤 것도 완벽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구나!"라는 식으로 우리에게서 희망을 앗아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괴로움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로움은 그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함께 소멸하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적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조건을 똑바로 직시하여 수용할 것은 수용함으로써 두 번 다시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조건인 경우는 애초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 없었거나 잘못된 원인으로써 쓸데없는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 낸 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고,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만물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무상無常을 알지 못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몸(색色), 느낌(수受), 생각(상想), 의지(행行), 인식(식識)을 오온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붓다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아, 몸 · 느낌 · 생각 · 의지 · 인식은 무상하다. 이것들을 일어나게 한 원인과 조건도 무상하다. 비구들아, 무상한 것에서 일어난 것들이 어찌 영원하겠는가."


  모든 현상은 매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생멸을 끝없이 반복합니다. 이 생멸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없어지는데, 이 무상에 저항하고 무상한 현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물은 무상하기 때문에 죽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태어납니다. 이 무상에 저항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붓다의 말씀이나 무상을 알아야만 괴로움에서 쉽고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이를 알고 바르게만 처신한다면 고통에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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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과 성냄은 대표적인 해로운 마음니다. 

  《째따시까》에서는 탐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덩굴식물(creeper)과 같아서 나무를 감아 조이는 것이 마치 희생자의 목을 감아 질식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탐욕은 큰 바다와 같아서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탐욕은 욕망이나 어떤 기대와 같이 거칠 수도 있고 아니면 미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 탐욕은,

  탐욕은 '원숭이를 잡는 끈끈이' 처럼 대상을 움켜쥐는 것이 특징이다. 뜨거운 팬에 달라붙는 고기 덩어리처럼 달라붙는 역할을 한다. 램프의 검댕이처럼 포기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가까운 원인은 구속될 대상들에서 달콤함을 보기 때문이다. 탐욕은 갈애의 강물로 불어나 중생을 악처로 인도한다고 알아야 한다. 마치 넘실거리는 강이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원숭이를 잡는 회반죽은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상응부에 끈끈이를 사용해서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 원숭이들이 '어리석음과 탐욕'이 없다면 결코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원숭이는 손을 뻗어 그것을 한 손으로 만져본다. 그러면 손이 붙어버린다. 그때 원숭이는 "내손을 빼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른 손으로 밀어 보지만 그 손마저 붙어 버린다. 두 손을 떼어내기 위하여 이번에는 한 발로 밀어 보지만 그것도 붙어 버리고 이렇게 남은 발마저 붙어 버린다. 두 손과 두 발을 떼려고 이번에는 주둥이를 사용해 보지만 역시 붙어버린다. 원숭이는 이렇게 다섯 가지 함정에 빠져 울부짖는다. 불행은 이렇게 다가온다.


  성냄의 원인은 언제나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냄의 원인은 늘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성냄의 진정한 원인은 내 안에 있습니다. 성냄은 습관처럼 누적되어 온 것이므로 어디에서나 성냄의 대상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즐거운 대상에 취착하고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지 못하면 화가 납니다. 성을 낸다는 것은 성냄의 조건인 탐욕이 아주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앗타살리니에 성냄은,

  두드려 맞은 뱀처럼 화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혹은 심술궂음이 특징이다. 한 방울의 독처럼 번져나가는 역할을 한다. 혹은 숲속에 난 불처럼 자신의 의지처를 태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가심으로 혹은 기회를 포착한 원수처럼 성냄으로 나타난다. 성냄의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독소가 섞인 오줌으로 여겨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탐욕스러운 원숭이와 두드려 맞은 뱀처럼 행동하고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탐욕이고 성냄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화약고를 항상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괴로움의 원인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원인을 없애거나 조절할 힘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하기에 따라서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내지 않고, 순간적인 욕망과 쾌락을 멀리하면서 매순간 평온함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어떤 괴로움과 성냄도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편안한 잠자리를 원하며, 환상적인 성관계를 갈망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면서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매순간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위 욕구를 없애려 들거나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매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욕구를 채울 수 있으며 나아가 더 큰 즐거움과 행복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 바른 행동과 바르지 못한 행동 등 그 어떤 것이라도 깨어있는 상태에서 온전히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지혜를 계발하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원인'을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또, 이미 원인과 조건이 성립되어 나타난 결과일지라도 그 본질은 '공'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고통은 한 순간에 눈녹듯이 사라져 버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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