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성장과 욕망, 그리고 명상> 이것들은 무슨 관계?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지난 시간에 이어,,

<이성에 의해 잉태된 기쁜 욕망>


  모든 행동이 우리의 의식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에 의해 결정된다니!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 무력한 존재들이 아닌가. 우리는 무의식이 하자는 대로 따라만 가는 무의식의 허수아비들인가! 스피노자 선생님, 당신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너무도 가련한 존재 아닌가요.


  그러나 아직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서도 변화의 여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우울한 상황은 역량의 성장과 함께 충분히 변해 갈 수 있습니다. 마치 아기의 소화 능력이 커 가면서 점점 성장하여 이유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아주 미약했던 역량도 커가면서 조금씩 성장하게 되고, 어느덧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몰라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역량의 크기와 성장 속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흔히 그것을 사람의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욕망이 행동의 원인이 되듯이, 욕망의 결과로서 나타난 하나의 행동은 다시 다른 사건들의 원인이 됩니다. 쉽게 도식화하자면 아마 아래와 같은 겁니다.


욕망 → 행동 → 다른 사건 → 또 다른 사건


  여기서 앞에 놓인 것은 다음에 놓인 것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원인은 다른 결과를 계속해서 낳고, 이런 인과 관계의 흐름은 끝없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내부의 역량이 성장하면서 원인과 결과에 따른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에겐 전혀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즉 사소하게 보이는 감기가 심각한 폐렴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더 심한 경우 사랑하는 동생의 소중한 쳥력과 생명마저 앗아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미리 알았더라면, 소년의 마음속에서는 '동생이 아파사해서는 안 돼. 동생을 끝까지 보살피고 지켜 주고 싶어'와 같은 강한 울림(새로운 욕망)이 생겨났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소년은 맛있는 과자를 사 먹는 순간적인 기쁨보다, 자신이 사온 약을 통해 차차 회복되어 가는 동생을 지켜보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과 관계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 벌어질 앞으로의 결과들 말입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식은 우리 영혼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인 '이성'에 의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스피노자가 말한 이성의 힘이란 필연적인 인과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통해 더 큰 역량을 가지게 될수록, 우리는 더 새롭고 더 바람직하며 더 강한 욕망들을 늘 가슴속에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새로이 준비된 욕망들은 우리가 어떤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굳이 의식적인 선택의 망설임이 없더라도 우리를 보다 현명한 길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인도해 주는 우리 내부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신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아까 분명히 역량이란 욕망을 실현시키는 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번엔 역량을 말씀하시면서 이성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이성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니 조금 헷갈립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맞습니다.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역량이란 이미 알고 계신 대로 욕망, 즉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제 여기에 새로운 의미 하나가 더 추가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에 의한 인식'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역량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이성에 의한 인식 능력 모두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보통 이성과 욕망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흔히 이성이 욕망을 무조건 억눌러 억제시킨다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성과 욕망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여기는 거지요. 그런데 실은 이성은 오히려 욕망을 만들어 줍니다. 새로운 욕망을 계속 샘솟게 해 주니까요. 즉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이성은 욕망의 새로운 싹을 키워 내면서 욕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욕망과 이성,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 두 단어는 스피노자 사상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또 그가 끝까지 버릴수 없었던 고귀한 사유의 재료이자, 우리 영혼의 근원적 요소입니다.



<성장과 욕망, 그리고 명상> 이것들은 무슨 관계?



마음속의 쇠사슬, 죄책감


  앞서 후회란,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연민과 안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대개 우리는 과거의 그 순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얼을 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듯 그것은 단지 불가능한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몰라보게 성장한 지금 당신의 역량은 과거의 당신이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지 그때의 상황이 당신의 미약한 역량과 맞물려 그런 식으로 인과 관계를 형성했고, 거기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필연적 과정이 당신의 행동을 결정했던 겁니다.


  필연은 아무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다만 장대한 인과 법칙에 따라 도도히 흘러갈 뿐. 당신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필연에 의해 떠밀리듯 그런 결정으로 내몰렸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당시엔 가지고 있지도 않던 지금 역량의 잣대로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왕성한 소화 능력을 가지게 된 어른이 지난날 자신이 아기였을 때 이유식밖에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는 어리석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스피노자의 철학적 아들인 니체의 말마따나, 미련이란 '정신의 소화불량'이며, 후회란 '정신의 구토'인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소화시킬 수 없어 토해 내는 반복적인 ㅗ가정이 바로 후회니까요. 어쩌면 이것은 자기 학대를 통해 얻는 자기 연민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입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거북한 속을 게워 내고 나면 한결 편안해지듯이, 당신은 힘겨운 후회 과정을 통해 자신을 가련하게 만들어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런 자기 연민은 과거의 사건에도, 당신이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그에게도, 또 당신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은 헛된 자기 연민과 후회가 아닙니다. 그때의 역량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과감한 결정을, 이제 오늘 당신이 망설임 없이 할 수 있게 된 당신의 성장에 감사드려야 할 뿐입니다. 후회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때는 보지 못한 것을 지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적 차이의 증거니까요. 따라서 당신은 과거에는 가질 수 없었던 좀 더 성숙한 헤안과 용기를 이제 가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은 훗날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당신에게 보다 현명한 길을 인도하는 소중한 성찰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후회의 다른 이름인 죄책감도 애써 간직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남을 미워하고 파괴하는 '원한'도 버려야 할 마음의 병이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죄책감' 역시 오래 쥐괴 있어서는 안 될 마음의 짐입니다. 당신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죄책감은 당신을 서서히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신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늘 과거에만 머물고 현재가 없는 상태입니다. 죄책감이란 현재를 잊게 하고 당신을 과거에 잡아두는 정신의 쇠사슬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니체는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기억은 병이며, 망각은 치유다.


    니체의 저 말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단지 되돌일 수도 없는 휘회스러운 순간이 만든 죄책감은 내려놓고, 대신 그 순간을 성찰의 눈으로 담담히 바라보자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어쩔 수 없었던 '선택'에 대한 미련이 휘회라면, 과거 당신의 미약했던 '역량'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성찰입니다. 이로써 성찰은 역량의 성장을 위한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미래의 또 다른 불행을 예방할 수 있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성찰이기도 합니다.

  몰론 깊었던 원한을 풀어 남을 용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죄책감을 없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후회와 죄책감이 부정적인 자기 연민이라면,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어더면 긍정적인 자기 배려의 첫 시작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더 이상 후회하지 마시길 기원합니다.



<성장과 욕망, 그리고 명상> 이것들은 무슨 관계?






<성장과 욕망, 그리고 명상> 이것들은 무슨 관계?



오늘 또 한번 나의 좌우명을 밝혀야겠다.

"죽음을 앞둔 순간 '후회없이 잘 살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자."는 것이 나의 좌우명이다. 


  살면서 후회를 안할 수는 없다.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나서 보면 항상 더 좋은 선택이 존재했다. 가장 좋은 선택이 꼭 최상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과 판단을 한다. 이 선택과 판단이 원인이 되어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선택 외에도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기대한 만큼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땐 전혀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다른 원인(조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만 한다. 차선이 아니라 '최선'이다. 차선을 선택하는 순간 후회할 일을 하나 저축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이 쌓여 '후회스런 인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위에서도 밝혔지만), 우리가 선택한 것,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 순간 자신의 역량에 절대적인 양향을 받는다. 각자가 알고 있는 '앎(지식과 지혜)' 이상의 것을 원인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성장하고 큰 역량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욕구중에서 '성장'의 욕구는 자아실현 욕구와 더불어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차원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고, 의뜸이라는 뜻이 아니라 매슬로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기본욕구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욕구로 받아들이는게 옳을 듯 하다. 쉽게 말해, 자아실현의 욕구는 이전 단계인 '자기 존중의 욕구'가 만족되어야만 일어나는 기본욕구인 것이다.  


  매슬로는 인간의 기본욕구를 5단계로 나눴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이 있고, 2단계는 '안전 욕구'로 안전하고 싶은 욕구, 안정을 추구하는 욕구, 보호받고 싶은 욕구, 위안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3단계는 '사랑의 욕구'로써 사람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구, 호의에 관한 욕구 등이 있으며, 4단계는 '자기 존중의 욕구'로 이 단계에서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 욕구, 타인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으며 마지막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의 본성에 진실함으로써 얻어지는 궁국의 행복에 대한 욕구, 자기 완성의 욕망(잠재적인 자신의 모습을 실현하려는 성향), 자신이 진정으로 될 수 있는 정점에 이르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한편, 매슬로는 기본 욕구의 충족을 위한 전제 조건들이 필요한데,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본 욕구 자체가 직접 위험에 빠진 듯한 반발이 생긴다고 했다. 그 예로는 언론의 자유,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 표현의 자유, 정보를 탐색하고 조사할 자유, 집단 내에서 자기 자신과 정의와 공정함과 정직함과 질서를 수호할 자유 등이 있다. 이런 자유들이 좌절된 사람은 신체가 직접 위협받거나 위기 상황이 발생한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이런 전제 조건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충족이 곧 목적인 기본 욕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목적이나 다름없다.

  또한, 인지능력(지각능력, 지능, 학습능력)이 우리의 기본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기능하는 한 묶음의 적응 도구라고 말하면서, 인지능력이 위험에 빠지거나 사용할 수 없게 저지되거나 빼앗기는 것은 기본 욕구 자체를 간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호기심, 지식과 진리와 지혜의 추구,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끝없는 충동 등의 전반적인 문제에 부분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말하였다.


  스피노자의 말이나 매슬로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욕망'의 중요성을 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 근저에는 욕망이라고 하는 강력한 마음(본능)이 자리잡고 있어서 매순간 선택과 판단, 결심, 결정을 지배한다. 매슬로가 정의한 5단계 기본 욕구의 위계질서가 어떠하든(매슬로는 1단계 욕구 충족이 2간계 욕구를 불러오고 2단계 욕구가 3단계, 이런 식으로 5간계의 기본 욕구는 4단계까지 충족된 상태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기본 욕구의 위계 순서는 가변성 또한 가지고 있다),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욕망과 욕구가 무엇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각자가 내린 선택과 판단, 결심의 근본적 동기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결과를 예측하고 분석할 수 있다. 


  '욕심이 과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다른 말로 '욕구, 욕망이 과하다'고 바꿔쓸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뜻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자신의 특정 욕망이 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과 같으며, 내재된 욕망을 들여다 봄으로써 결여된 욕망이나 욕구를 채워 삶의 균형을 이르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한 마디 더 한다면, 욕구와 욕망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면서 평소 내리는 선택과 판단, 결심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욕구와 욕망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앞에 나타난 모든 결과물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과 욕망, 그리고 명상> 이것들은 무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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