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명상 73,74일차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에서······.


스피노자는,

흔히 스피노자를 일러 '감정의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 누구보다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기에, 또 세상으로부터 그 누구보다 더 모진 냉대와 박해를 받은 철학자였기에, 고통스러운 살갗으로부터 배어 나온 그의 통찰은 우리 피부 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듭니다. 어찌 보면 감정은 우리의 피부처럼 우리 자신과 외부의 경계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가 끝나고 우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만큼 감정은 우리 내부를 표현해 내는 최전선에 선 첨병입니다. 



감정의 주인,

 나뭇가지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새들의 종종거리는 발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꼭 울창한 숲이 아니더라도, 이른 아침이면 아파트 정원의 작은 나무 아래서 귀여운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녀석들은 해가 뜨자마자 벌레를 잡기 위해 아침 사냥에 나섭니다. 그날의 사냥 성적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둥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귀여운 새끼들을 위해, 혹은 알을 품은 사랑하는 짝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먹이를 구하는 작지만 당찬 모습.


  녀석들은 아파트 옥상을 훌적 뛰어넘어 높은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을 비틀어 급강하며 지면 위로 미끄러지듯 아찔한 곡예비행을 선보입니다. 이침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시작된 그런 멋진 비행을 통해, 각각의 높이에서 모든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고귀한 시선의 자유가 그들에게 허락됩니다. 가장 높은 고결한 공기를 마시며 가장 낮은 곳의 번잡한 생명의 세계를 천진한 눈으로 굽어봅니다. 그들에게 창공은 자부심이며 지상은 먹잇감이 살아 숨 쉬는 삶의 터전입니다.


  광장에서 누군가 흘린 빵 부스러기를 우연히 발견한 비둘기의 초라한 기쁨은 이들 자유로운 새에겐 모욕입니다. 빵 부스러기의 기억에 다시 광장을 찾는 비둘기의 회기 본능을 이들은 경멸합니다. 누군가 먹이를 던져 주면 한없이 기뻐하고, 그런 사람이 없는 날은 깊은 슬픔에 빠져 버리는 비둘기들은 그들에게 같은 종족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새들은 스스로 목이를 사냥합니다. 먹잇감이 부족한 날이면 잡아온 먹이를 남김없이 토해 내 모두 새끼들을 먹이고, 자신은 굶을망정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배 비천한 아양과 구걸만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 운명을 향해 잣니의 전부를 던집니다. 그래서 비둘기와는 달리 먹이가 없는 날에도 그들은 그토록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아침 나뭇가지의 새들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기에 그 새들이 참 좋습니다. 자신의 하루에 의연히 주인이 되는 그들의 당당함과 자유로움 말입니다.


  지금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아마도 광장의 비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기쁨을 만드어 내지 못하고, 외부에서 던져 준 빵 한 조각에 단지 열렬히 반응하며 그것의 양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는 애처로운 비둘기들 말입니다. 혹시나 내일이 오면 누군가 큰 빵이라도 던져 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에 비둘기들은 오늘도 광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일은 늘 똑같은 오늘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비둘기들의 상상 속 내일은 오늘의 그들을 이렇게 광장에 붙잡아둡니다.








  무언가에 의존하면 할 수록 우리는 그것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더 끌려다니면 다닐수록 우리를 구속하는 그 무언가의 힘은 더욱 강해집니다. 이렇게 그것은 우리의 의존을 먹고삽니다. 따라서 더 강력해진 그 무언가의 앞에서 우리는 오늘 하루도 싫든 좋든 힘겨운 감정의 마스크를 뒤집어써야만 합니다.


  당당하지 못한 우리 삶은 어쩌면 우리가 겪어 온 모진 상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시간을 통해 우리가 겪어 온 무수한 상처의 흔적이야말로 어쩌면 우리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이 중에서 큰 상처는 우리에게 절망스러운 슬픔을 안겨 주고, 작은 상처는 그나마 안도감을 느끼게 하며, 상처 사이에 난 작고 평온한 틈바구니는 달콤하지만 극히 짧은 기쁨을 선사해 주기도 합니다. 비둘기들의 초라한 기쁨 한 조각 말입니다.

  늘 상처와 감정에 힘겨워하는 우리를 향해 철학자 스피노자는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따뜻한 음성은 그의 가슴속에 간직된 포근한 온기마저 느끼게 합니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 감정의 주인이 되십시오. 비록 힘겨울지라도 제가 당신께 보여 드릴 하나의 길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꼭 정답일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면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없으니까요. 이제부터라도 그 길을 함께 찾아보면 어떨까요. 누군가 미리 정해 둔 정답이 아닌 당신이 찾아낼 당신만의 삶의 해답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 감정의 주인, 더 나아가 당신 삶의 주인이 되는 길 말입니다. 


   당신 스스로 이런 소중한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스피노자의 말마따나 당신은 당신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을겁니다. 왜냐면 감정이란 욕망이 성취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눈금이니까요. 다시 말해 당신이 느끼는 모든 기쁨과 슬픔이란 다름 아닌 당신이 바라는 바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나타내는 감정의 진폭이니까요. 이렇게 감정이 피부와 같다면 욕망은 그 피부 아래 놓은 당신의 내보, 그러니까 당신 자체인지도 모습니다.


  전염력이 극히 강한 타인의 욕망에 무비판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며, 끝내 그 아래 간직된 당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삶 앞에 가장 당당한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겁니다. 감정과 욕망의 주인이자 자기 삶의 의연한 주인으로서 말입니다. 마치 예속된 광장을 탈출하여 자신만의 자유로운 욕망의 숲으로 날아가는 비둘기처럼, 혹은 이른 아침 나뭇가지 위에서 바스락거리며 자부심에 넘치는 욕망의 깃털을 고르는 새들처럼 말입니다.



명상 73,74일차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





명상 73,74일차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


자유 의지라는 허상

  어찌 보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욕망이라는 방아쇠에 의해 당겨져 발사되는 탄환과 같습니다. 주저하듯 욕망이 없다면 행동는 시작될 수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우리는 방아쇠의 움직임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즉시 발사될 뿐입니다. 욕망이 원인이며, 행동은 그 결과입니다. 또 욕망은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우리 영혼의 저 깊은 무의식에서 이미 결정을 내립니다.


  이렇게 의식과 무관하게 욕망에 실리는 순간, 행동의 탄환은 정확히 발사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총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무의식적인 욕망이 이미 우리의 총을 선택하고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 따라 행동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선택이란 아예 없으며, 다만 무의식적인 욕망의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로운 의지, 즉 자유로운 의지는 환상일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합니다. 덧붙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욕구한다고 믿으며, 성난 소년은 자유 의지에 따라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유로운 의지에 다라 선택했다고 여기는 것은, 단지 욕망이 이미 결정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배고품을 해결하려는 욕망, 감정에 휘말린 공격적 욕망, 자신의 안정에 대한 욕망이 이런 행동들을 이며 결정하고 행동하게 만드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 스스로 의지에 따라 선택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에 의해 시작되고 또 끝납니다. 정신적 결단이란 결국 욕망의 명령에 뒤늦게 따라 하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쉬운 예

  에를 들어 당신에게도 가끔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날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유혹을 이겨 내고 출근하기로 결정한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회사를 관두고 싶은 내 욕망을 억누르고, 내 자유 의지에 따라 출근하기로 결정했어.' 그러나 실은 당신의 마음속에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직장을 잃게 되면 수입이 끊겨 생활이 더 힘들어질 것이니 최선은 아니지만 당분간만이라도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고픈 욕망도 같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두 욕망이 서로 겨루다가 더 큰 욕망, 그러니까 최소한의 경제적인 수입은 얻고 싶다는 욕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행도을 결정한 것입니다.

  즉 의식적인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이 당신을 움직인 것입니다. 다만 이런 무의식적인 욕망이 결정해 버린 것을 의식적인 자유 의지가 선택했다고 오인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다만 그 상황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욕망을 따를 뿐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자유 의지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달리는 말馬 등에 올라탄 한 마리의 벼룩이 말을 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말은 우리의 욕망이며, 벼룩은 자유 의지라는 허상이 되겠지요.



명상 73,74일차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





인간은 큰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할 만큼의 지혜와 인내심의 결여로, 순탄하지 못하고 불만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인간을 단순히 '이기적인 존재'라거나 '인간은 누구나 이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진짜 이기적 존재라면 스스로 정말 하고 싶은 것, 하면 좋은 것들에 집중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대부분은 사회의 규범과 관념, 그리고 타자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또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해로운 행동을 더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인간이 이기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만큼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고 한 부분이 과했다면 '인간은 큰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할 만큼의 지혜와 인내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 말은 어떤가? 부드럽게 표현하니 받아들이기가 조금 쉬워졌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단지, 자신에게 충실하면서도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이런 인간의 습성을 두고 왈가불가 할 필요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흑백논리로 본다면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로움을 끼쳤다고 할 수 있고, 가능성의 측면에서도 '이로움을 끼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경우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쉬운 예로, 청소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어떤 집단이 있다고 해보자. 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청소대행 서비스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깨끗한 환경을 좋아하는, 그래서 청소를 아주 열심히 잘 하는 구성원이 새로 들어왔다. 이 사람은 남들이 청소하는 것을 도와주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욕구대로 청소를 매일 열심히 하였다. 그러다보니 이 집단이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 아주 청결한 곳으로 탈바꿈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청정한 공기를 마시면서 각자의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깨끗함이 좋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나머지 구성원들도 어느날 부터인지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청소를 거들기 시작했다.(미안함에게 기인했든,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든) 청소비용을 아낀 것은 물론이고 건물 전체를 깨끗하게 관리했고, 나아가 건물앞 환경까지 신경쓰게 되었다. 


 나 좋다고 시작한 일이 구성원들에게까지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 이 이야기는 '이타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타심'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자기 중심적 사고'와 '이기적인 행동'이 결과적으로 선순환으로 작용한 것이다. 새로 들어온 이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 집단에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타인의 무관심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꾸준히 할 수 있는 인내심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지혜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명상 73,74일차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



작가 이만교는 《글쓰기 공작소 실천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 노력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그 사람에게 노력할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의지박약인 것이다. 술을 끊겠다며 끊지 못하는 사람, 일찍 일어나겠다며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 도박을 그만두겠다며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 화를 내지 않겠다며 다시 화를 내는 사람 모두 의지가 박약해서다, 라고 우리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여러 뇌과학 실험에 의하면, 자유의지라 불릴 만한 것이 우리 개인에게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벤저민 리벳Benjamin Libt의 실험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300~700밀리초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뇌파검사를 이용하여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지원자에게 10분 안에 스스로 선택해 아무 때나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지시했다.

  이 사실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가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주관적 느낌이 강하지만, 뇌전도 측정 결과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거의 1초쯤 앞서 뇌 활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뇌의 명령이 1초 먼저 시작된다면 우리의 의지가 원인일 수 있을까.


  또 다른 연구에선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어떤 단추를 누를지 결정하는 순간 어떤 신호가 나타나는지 살폈다. 실험자들은 피험자들이 결정을 의식적으로 내리기 전에 어떤 단추를 누를지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는 뇌 부위 두 곳을 발견했다. 최근에는 뇌피질에서 직접 녹화한 정보로 피험자가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 700밀리초 전에 뇌피질에서 단256개의 뉴련 활동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통해 피험자 결정을 80퍼센트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발견들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의식적 주인'이라는 일반적 통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자신이 다음에 뭘 할지 알기 전 찰나의 순간에 우리의 뇌는 우리가 뭘 할지를 이미 결정해놓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결정을 의식하게 되어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과성속에 있다고 믿어버린다.(샘 해리스, 『자유 의지는 없다』)

  

  이들 실험에 따르면, 자유의지란 일종의 사후事後 개념이다. 우리가 노력하면 좋은 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박약해서가 아니다. 그런 자유의지 따위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는 내가 의식적으로 만드는 게 이니라 뒤늦게 의식화되는 것을 인지하는 반응이다. 결정은, 의식하기 전에 만들어진다. 수만은 점화Priming들에 의해.



다음시간에,,,



명상 73,74일차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국내도서
저자 : 심강현
출판 : 을유문화사 20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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