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용수의 《중론》지난 시간에 이어, 명상 71, 72일차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_김성철》에서,,

2. 연기에 대한 분석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조건에서 결과가 발생한다'고 할 때 그 조건의 종류를 네 가지로 세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연(四緣) 이론이다. 싹을 틔우는 씨앗과 같이 직접적 조건인 인연(因緣:직접적 조건), 눈에 형상이 보이고 귀에 소리가 들릴 때 형상과 소리와 같이 지각의 대상이 되는 조건인 연연(緣緣:지각의 조건), 우리의 마음이 한 순간도 머루르지 않고 매 찰나 변해 간다고 할때 찰나의 마음이 발생하도록 앞 찰나의 마음이 조건의 역할을 한 후 소멸하게 되는데 그때 앞 찰나의 마음을 의미하는 차제연(次第緣:시간적 조건), 어떤 결과가 발생할 때 그 결과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증상연(增上緣:강력한 조건)의 네 가지의 사연이다. 연기의 '연(조건)'을 세분하면 이렇게 네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론》에서는 이런 사연설 모두가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이 중 차제연만을 예로 들어 《중론》의 비판을 소개해 보자. 《중론》이 난해한 이유는 4구비판의 논리가 난해한 데 기인하기도 하지만,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난해한 아비달마 교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차제연에 대한 《중론》의 비판을 이해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그 비판의 논리를 이해하기에 앞서 아비달마 교학에서 말하는 차제연 이론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우선해야 한다. 그러면 좀 장황하긴 하지만 먼저 차제연 이론의 성립과정에 대해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초기불전에는 다음과 같은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이란 가르침이 등장한다.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諸行無常). 그런 존재는 아뜨만(Atman)이 아니다(諸法無我). 따라서 모든 것은 괴로움 뿐이다. 이를 자각할 경우 마음에 평화가 온다. 부처님 당시 많은 종교인들이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자아'를 의미하는 '아뜨만'을 찾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 수행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셨다. 영원한 아뜨만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부단히 흘러가는 우리 의식의 한 모습일 뿐이다. 지금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언젠가는 스러지고 만다.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최고의 종교적 경지는 아뜨만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상세계 그 어느 곳에도 안주할 곳이 없다는 사실, 즉 내가 추구할 만한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해 일체가 궁극적으로 괴로움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여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끊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오직 괴로움뿐인 이 윤회의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모든 번뇌를 끊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된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르는데 아라한이 될 경우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나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

  고결한 삶도 완성되었고,

  할 일을 다 이루었으니,

  앞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


  이 순간 수행자는고요한 열반을 체득한다. 살아서 체득한 이러한 열반의 경지는, 아직 의지할 몸이 남아 있는 상태의 열반이기에 '유여의열반' 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다. 그 후 육신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열반은 '완전한 열반' 이며, 의지할 몸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무여의열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열반을 가르치는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교법 중 첫 번째 것인 '제행무상의 진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찰나설'을 고안하게 된다. 찰나란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최소 단위이다. '인연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부정적 표현을 '모든 존재는 단 한 찰나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긍정적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찰나설이다. 모든 존재는 단 한 찰나만 존재하고 사라진다.


  매 찰나의 사건은 반드시 앞 찰나의 사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비약은 없다. 매 찰나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존재는 현재로 흘러오지 못하고, 현재의 존재는 미래로 흘러가지 못한다. 10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내가 아니지만, 한 찰나 전의 나도 지금 찰나의 내가 아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손과 발, 심장과 뇌 등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은 모두 지금부터 1년 이내에 섭취한 음식물이 변해서 된 것들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 있던 나의 몸은 지금은 모두 때가 되고 배설물이 되어 배출되어 버렸다. 과거에 내가 갖고 있던 머리칼이나 손톱은 지금 모두 잘라지고 깍여져서 존재하지 않듯이······.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찰나 찰나 나의 몸 전체는 새롭게 변하고 있다. 변하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내 마음의 경우도 어제의 마음, 작년의 마음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도 생각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우리가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기억도 무상하게 변한다고 가르친다. 변치 않는 자아에 기억이 새겨졌다가 시간이 흐른 후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때 그것이 회상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기억되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고, 그것을 회상하는 것 역시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사슬이 풀리듯이 회상이 일어난다. 회상이란 현재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반응일 뿐 과거가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망각이나 기억 착오가 있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든, 마음이든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매 찰나 변해 간다.


  시위를 떠난 화살 역시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단 한 찰나만 머물 뿐이기에 시위에 있던 화살은 그 시간대의 시위에만 존재할 뿐이고, 과녁을 맞힌 화살은 변화된 다른 화살이다. 애초의 화살과 만나려면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세상만사는 단 한 찰나만 존재할 뿐이다. 매 찰나 새로운 세상만사가 나타난다. 이것이 아비달마 교학의 찰나설이다. 

  그리고 이러한 찰나설에 토대를 두고 차제연의 이론이 구성되었던 것이다. 매 찰나 존재하던 것은 소멸하고 그에 의거하여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야 한다. 앞 찰나의 마음이 조건의 역할을 한 후 소멸함으로써 뒤 찰나의 마음이 발생한다. 이것이 차제연 이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제연 이론을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존재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소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조건의 역할을 하겠느냐?

  그러므로 차제연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용수의 《중론》지난 시간에 이어, 명상 71, 72일차



매 찰나마다 새로운 존재가 발생한다는 찰나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론으로 구성될 수 있다. 첫째는 앞 찰나의 존재가 존재하면서 조건의 역할을 하여 다음 찰나의 존재가 발생한다는 이론이고, 둘째는 앞 찰나의 존재가 소멸한 후 그것이 조건이 되어 다음 찰나의 존재가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다음 찰나의 존재를 위한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이론에서 말하듯이 앞 찰나의 존재가 다음 찰나의 존재와 공존해야 한다. 그러나 앞 찰나와 다음 찰나가 공존한다고 할 경우, 결국 모든 앞뒤 찰나들이 공존하는 꽃이 되어 시간의 흐름이 정지해야 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성된 것이 '앞 찰나의 존재가 사라진 후 그것을 조건으로 삼아 뒤 찰나의 존재가 발생한다'는 둘째 이론인데, 아비달마 교학의 차제연 이론에서는 이 둘째 이론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미 소멸해 버린 존재는 다음 찰나의 존재를 위해 조건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무엇이 존재해야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법인데, 앞 찰나의 존재가 이미 소멸해 버렸다면 조건의 역할을 하기 위해 다음 찰나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중론》은 '연기론'이다. 그런데 《중론》의 첫 장인 제1 <관인연품>에서는 '언어로 표현된 연기', 또는 '이론으로 구성된 연기'가 범하게 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연기에 대해 '조건에서 결과가 발생한다'고 전체적으로 규정하든, 아니면 그런 조건을 인연 · 연연 · 차제연 · 중상연의 네 가지로 분류한 후 연기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든 모두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래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제1 <관연연품>을 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보든, 낱낱이 보든

  조건 속에 결과는 없다.

  조건 속에 없는 결과가

  어떻게 조건이 아닌 것들로부터 발생하겠는가?

  MK. 1-13


  그러므로 결과는 조건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조건 아닌 것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조건이나 조건 아닌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MK. 1-16


  여기서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조건에서 결과가 발생한다'는 연기에 대한 포괄적 정의를 고찰해 본다는 의미이고, '낱낱이 본다'는 것은 인연 · 연연 · 차제연 · 중상연의 사연 하나하나의 정의에 대해 고찰해 본다는 것이다. 위에서는 차제연 이론에 대한 비판만 소개했지만, 나머지 세 가지 이론은 물론이고, 연기에 대한 포괄적 정의를 포함하여 연기에 대한 모든 이론들은 다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렇게 언어화된 표현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에 대해 깊이 자각할 때 우리는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게 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지나서 '달'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가운데 『형이상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첫 줄에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알려고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이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명상 71일차>



<명상 72일차>



용수의 《중론》지난 시간에 이어, 명상 71, 7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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