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저는 왕자입니다. 당신의 자화상은 거지입니까? 왕자입니까?





《나를 더 나답게_원빈》 들어가는 말에서,,

이 세상의 모든 거지왕자들에게


  한 나라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늦둥이 외아들을 겨우 얻었는데, 아이를 어찌나 사랑했는지 태어나기도 전에 벼슬을 내렸습니다. 온 나라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왕자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왕자를 바라보는 왕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만발했고, 왕의 기운이 좋아지는 만큼 백성들도 웃을 일이 많아졌으니까요. 왕자는 존재만으로도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왕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온 나라를 뒤졌지만 작은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갔고, 온 나라가 비탄으로 뒤덮인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은 20년이 넘도록 왕자를 찾아 해맸습니다. 간절하면 통하는 것일까요? 어느 날, 젊은 거지 한 명과 우연히 마주친 왕은 단박에 잃어버린 아들임을 직감했죠. 기쁨으로 가득 찬 왕은 거지왕자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20년 전 잃어버린 내 ㄷ아들이다. 너는 거지가 아니라 왕자다."

  평생을 거지로 살아온 왕자가 과연 이 말을 믿었을까요?

  우리는 본래 태어나는 순간 아무런 조건이 필요 없는 기쁨입니다. 존재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하지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온 우리는 사실 태생적으로 왕자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는 데 조건이 붙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착해야 하며, 예뻐야 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20년을 넘게 그렇게 살다 보니 사랑받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지가 밥을 얻어먹기 위해 애처롭게 구걸을 해야 하듯 우리 역시 노력으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관념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평생을 거지로 살아온 이가 과연 자신이 고귀한 왕자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지왕자는 도망쳐버렸습니다. 왕이라는 작자가 미친 소리를 한다고 투덜대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운 아들을 찾았으나 아비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아들을 어저지 못해 안절부절인 왕에게 지혜로운 재상이 충언했습니다. 왕의 아들이 20년을 거지로 살아온 만큼 자신이 왕자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니, 먼저 그에게 적은 월급을 주고 마구간의 똥 치우는 일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면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거지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조건이라며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미치고 팔짝 뒬 노릇이었ㅅ브니다. 감히 내 고귀한 아들에게 말똥 치우는 일을 시키라니, 그것도 고작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주며, 하지만 왕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재상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거지 왕자는 말똥 치우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구걸해서 먹고사는 것보다는 훨씬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는 참 소중한 일이었지요. 열심히 하다 보니 마구간 하나를 관리하는 역할로 승진했고, 나중에는 왕실 마구간 전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차근차근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거지왕자는 결국 재상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훈련을 마쳤지요.


  재상은 수행을 마친 거지왕자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자신이 온전하고 고귀하며 존경받아 마땅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왕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시나요?"

  거지왕자는 드디어 자신이 왕자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충분히 교육받고, 인정과 칭찬을 얻고, 사랑받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고귀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한 수행을 통해 왕자의 자화상을 회복한 그는 재상을 거쳐 성군이 되었습니다. 거지와 와으이 삶을두루 경험하고 이해한 그의 현명한 통치 덕에 만백성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온전합니다. 행복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고, 우리는 모두 이 세계의 왕자입니다. 우리의 본래 자화상은 위대하고 고귀하니다. 다만 지금 그 진실을 잊고 있기에 약간의 훈련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조냊는 사랑받아 마땅합니다.'

  이 진실을 저를 찾아오는 왕자님들께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고, 본인을 자꾸 거지로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우리가 왕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되찾는 과정은 매우 단순합니다. 딱 한 가지 생각만 도리면 됩니다. 거지의 좌화상을 왕자의 좌화상으로 말입니다.








저는 왕자입니다. 당신의 자화상은 거지입니까? 왕자입니까?



<깨나의 명상 64일차>



자화상이 바뀌면


  현대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세 가지 단어를 꼽아보자면 불행, 자살, 비난입니다.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 대체 왜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혹시 행복의 우물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최선을 다해 삽질을 해왔던 것은 아니까요?


  행복의 우물이 샘솟는 곳을 찾는 비밀 한 가지를 공유하겠습니다. 주관적 행복은 자화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거지의 자화상을 지닌 존재, 왕자의 자화상을 지닌 존재, 상식적으로 누가 더 행복할까요?


  자화상이 존귀해지면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속으로 마음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화상이 버천해지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상황에서조차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르지요.

  무학대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돼지 눈에는 모두 돼지로만 보이고, 붓다 눈에는 모두 붓다로만 보인다."

  눈동자에 비치는 상대방은 나를 비춰보는 거울이빈다. 자화상이 거지라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거지로 인식되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비천한 거지의 자화상은 타인의 자화상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는 것은 그가 왕자가 아닌 거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 용어 중 투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신의 단점을 남에게 씌워 그를 비난하고 자신에게는 그 단점이 없는 척하는 것이지요. 다른 존재를 비난하고, 센 척하면서 거지와 같은 자화상을 잠시 잊는 것입니다. 


  불행, 자살, 비난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불행이 지극해지면 스스로를 해칠 뿐 아니라, 타인을 비난해서 세상의 불행을 증폭시킵니다. 비난받는 이가 행복감을 망치게 되면, 분노한 그는 다시 세상을 비난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불행에 감옥에 갇혀버립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수히 많습니다. 이럴 때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자화상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왕자 눈에는 모두가 고귀한 왕자로 보입니다. 만약 자화상을 왕자로 바꿀 수만 있다면, 모든 존재를 왕자로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지는 방법이지요.

  하지만 거지에서 왕자로 생각을 바구는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거지와 왕자를 가르는 생각의 벽은 예상보다 훨씬 두터울 수 있습니다.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저는 왕자입니다. 당신의 자화상은 거지입니까? 왕자입니까?



<깨나의 명상 65일차>



행복을 선택하는 연습

  이 세상 도처에서 온화한 흰 늑대와 흉포한 검은 늑대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흰 늑대의 이름은 희망이고, 검은 늑대의 이름은 절망입니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요? 검은 늑대라고 답한 이도 있을 것이고, 흰 늑대라고 답한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잘 먹는 늑대가 이긴다'입니다.


  희망과 절망의 줄다리기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당신의 인생 속에서도 항상 반복되어 왔습니다. 누군가는 경험적으로 절망이 이길 것을 예상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구는 희망이 이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환상을 품은 마음의 주인이 선택하는 쪽의 힘이 커지지요. 희망도 절망도 온전히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희망을 선택하세요. 희망을 선택하지 않고서는 행복연습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물론 희망을 한 번 선택했다고 해서 단박에 삶이 희망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가며 선택해온 만큼, 줄다리기의 승부는 막바로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줄다리기가 절망 쪽에 치우쳐 있든, 양쪽으로  팽팽하든, 희망으로 쏠려 있든 상관없습니다. 희망을 잡아당기는 이 순간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희망의 줄을 당겨버리세요. 이렇게 매번 새로운 선택을 희망으로 이끈다면, 절망의 편에 기울어진 마음을 완전히 날려버릴 날이 올 것입니다.



<깨나의 명상 66일차>



저는 왕자입니다. 당신의 자화상은 거지입니까? 왕자입니까?







  하루 종일 깔깔 웃어대는 천진한 아이들, 유치한 장난에도 배를 잡고 뒹굴고, 가위 바위 보를 종일토록 반복하며 눈앞의 친구를 온전히 사랑하는 아이들의 마음. 우리에게행복해서 웃고, 또 웃다가 기진맥진해도 웃음을 멈출 수 없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를 나 답게》를 지은 원빈 스님은 이것이 인간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또,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행복의 가능성을 타고 난다'고 하면서 육체, 지능, 집안, 외모 같은 조건의 평등이 아닌, 행복을 선택하는 마음의 능력을 우리 모두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좋은 말씀이고 적극 공감합니다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이 타고난 행복을 즐기는 능력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약해져갑니다. 어른들과 사회로부터 교육 받은 잘 사는 요령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앞서갈 수 있는 방편일 뿐, 그것이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천진하고 행복밖에 모르던 아이는 남들보다 조금 앞서는 것, 뒤쳐지지 않는 것, 1등하는 것, 공부에서 상위권에 드는 것,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남들이 좋은 대학이라고 말하는 곳에 합격하는 것, 돈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행복인 줄 알고 자라납니다. 


  하지만, 어린이 모두가 남들보다 뛰어날 수는 없습니다. 모두 1등을 할 수 없는 것이죠.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가 온 천지에 널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아이들이나 젊은 학생들은 '탈락자', '패배자'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립니다. 이 결과,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스스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젊은이들이 성인으로 자라 부모가 되면, 어린 시절 배웠던 요령에 자신의 실패 경험담을 보태어 자식들에게 똑같이 가르치고, 이런 현실은 무한반복됩니다.


  어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피해는 불행한 삶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시민의 혈세를 녹봉으로 받으면서도 본분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배 불리기에만 급급하고 무사태평한 공무원들, 책 몇 권 달달 외워서 국가고시에 합격한 것이 무슨 큰 벼슬이라고 뽕이란 뽕은 다 갔다붙인 안하무인 인간들, 시민의 건강을 지키는 의원인지 장사꾼인지 구별이 안되는 욕심쟁이들, 신앙심은 어디에 갔다 버렸는지 스스로 사탄이 되어버린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왜!왜?왜...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좋은 자리에 올라 비슷하게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누구는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 나라 걱정을 하고, 누구는 불손의 극치를 달리면서 나라를 멍들게 하고, 도대체 왜 이런걸까요? 어리석고 무지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믿고,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린데서 오는 무지와 어리석음이 그들을 망각속으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남들을 밟고 올라가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원하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정의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얘기가 잠시 엉뚱한 곳으로 빠졌었는데요.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현재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행한 과거의 행동들에서 얻은 경험적 교훈으로 그 반대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과연, 행복이 찾아올까요? 


  "이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어! 이런 삶이 행복한 삶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경험적으로 진정한 행복감을 느낀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요령이 아닌, 참된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것이죠. 또한, 굳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본보기가 되어 아이들 스스로 행복의 요소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어"가 아닌, "아빠, 엄마는 그냥 행복해! 네가 있어 너무 행복해!"라고 말해주는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한 특별한 이유나 조건같은 건 없어. 이미 넌 완벽하고 행복해지기 위한 모든 조건이 네 안에 들어 있어!"라며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파니샤드_정창영 편역》 2장에서,,

  죽음의 신 야마는 나치케타가 영적인 가르침을 받을 만한 훌륭한 구도자라는 것을 알고, 죽음에 대한 위대한 비밀을 말하기 시작했다. 

  "참 자아의 영속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길과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길이 있다. 이 두 길은 목적이 다르다. 어느 길을 택하든 사람은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 자아의 기쁨을 추구하여 인생의 지고한 목표에 도달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일시적인 쾌락을 좇다가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다. 삶의 매 순간이 참 자아의 영원한 기쁨이냐 아니면 감각적이 쾌락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전환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장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영원한 기쁨을 주는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당장 감각에 만족을 주는 길을 따라간다."



행복과 지혜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오래 전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자라난 이 희망의 메시지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믿고요. 언뜻보면 '행복'과 '불행'이 동전의 양면처럼 보이는데요. 하지만, 양쪽 어느면도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닙니다. 앞면이라고 해서 정상 가치가 있고, 뒷면이라고 해서 반값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행복과 불행 역시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불행하면 행복할 가능성을 내포한 채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영성과 종교에서 말하는 '참 나'라는 것은 결국,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또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저는 왕자입니다. 당신의 자화상은 거지입니까? 왕자입니까?



나를 더 나답게
국내도서
저자 : 원빈
출판 : 휴(休) 2018.05.10
상세보기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