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고미숙' 그리고 명상





《자기로부터의 혁명1_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소박에 대하여


  질문 : 소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질적인 요소만을 똑똑히 보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잘라버린다는 의미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 우선 소박하지 않은 것부터 보기로 합시다. 제발 "그것은 부정적이 대답입니다"라든가, "긍정적인 답을 가르쳐주십시오"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반응은 미숙하고 사려가 부족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착취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당신에게 주면서, 그것으로 당신을 착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런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소박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여러 가지 관념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롭게 관찰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혁명을 두려워합니다.


  그럼 우선 소박하지 않은 것을 발견해보도록 합시다. 복잡한 정신은 소박하지 못합니다. 똑똑한 정신도 소박하지 못합니다. 목적이나 보수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는 정신이나 공포를 안고 있는 정신도 소박하지 못합니다. 많은 지식을 담고 있는 정신이나 여러 가지 신념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정신도 소박한 정신이 아닙니다. 또는 보다 큰 것과 동일화되어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신도 소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말 필요한 의복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검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박함의 외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간단히 속아넘어갑니다. 그래서 대단히 돈이 많은 사람들은 지위나 권리를 포기한 사람을 숭배합니다. 


  그러면 소박이란 무엇일까요? 소박이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선택의 과정은 어떤 것일까요? 또한 선택을 하고 있는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신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을 택합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라고, 그러나 당신은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게 될까요? 그것은 남이 한 말을 기준으로 하던가, 또는 당신 자신의 경험이 "이것이 본질적인 요소다"라고 말해주는 것 중의 어느쪽일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경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선택할 때, 그 선택은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에게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와 똑같은 과정을 또 되풀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정신이 선택한다면 그 선택도 당연히 혼란된 것일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요소와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은 소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투쟁입니다. 투쟁하거나 혼란된 정신은 결코 소박해 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런 것을 포기하고 잘못된 것이나 정신의 트릭을 진실로 관찰한다면, 그때 당신은 자기 스스로 소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신념에 묶여 있던가 지식으로 손상된 정신은 소박하지 못합니다. 신이나 여성이나 음악에 의하여 주의력이 산만해진 정신은 소박하지 못합니다. 소박이란 관념을 수반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것은 창조성을 의미합니다. 그 창조성이 없는 한, 우리는 모든 불행과 비참과 파괴의 중심인 것입니다. 소박은 당신이 추구한다던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꽃이 정확한 시기에 피어나듯이, 우리가 생활과 자타의 관계를 이해했을 때에만 소박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본 일도 관찰해본 일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외관에 가치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소박이 아닙니다. 소박은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본질적인 요소와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선택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이 추측 · 결론 · 신념 · 주관과 같은 그물에 포착되어 있지 않을 때뿐입니다. 그와 같은 자유로운 정신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만이 추측할 수도 없고 명명할 수도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박인 것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고미숙' 그리고 명상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젼을 찾아서_고미숙》에서

글쓰기와 '자기수련'


그런데 의역학이라는 저 원대한 지평선 위를 질주하려면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행을 닦아야 한다. 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꿈이 아니라 망상일 뿐이다. 그럼 어떤행이  필요한가? 108배나 등산, 걷기 ,낭송 등등 방법은 수없이 많다. 뭘 택하건 매일의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가능하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 처음에는 힘들지만 몸이 그 리듬에 익숙해지면 그 시공간의 기운을 몸에 저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앎의 의지와 욕망이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실천이나 수행도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글쓰기가 가장 좋은 수련법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시대의 신체는 일단 산포적이다. 스펙터클과 중독증에 물들어 있어 전적으로 외부를 향해 있다. 우울하다든가 자살하고 싶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 자신에 대한 파괴적 욕구다. 몸과 마음 사이, 안과 밖의 간극이 이런 해체적 양상을 낳는 것이다. 이런 충동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이 간극을 줄이는 수렴작용이 필요한데, 글쓰기가 바로 그에 관한 최고의 기술에 해당한다. 글쓰기는 본디 지성의 장점이다. 삶과 세계를 언어로 구조화할 수 없다면 아직 지성의 주체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지성인이 된 이 시대에 가장 결락된 기술이기도 하다. 대학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고, 이런 차원에서 보더라도 최고의 전략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몸과 삶을 언어로 조직할 수 있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이 곧 정기신의 확보다. 물론 여기에는 차서가 있다. 먼저 독서의 밀도가 높아져야 한다. 지금 같은 독서는 밀도가 너무 약하다. 대충 한번 훑어보거나 마우스로 긁는 방식으로는 책과의 어떤 접속도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글쓰기를 지성의 중심에 놓으면 독서의 양상 자체가 달라진다. 낭송과 암송을 해야 하는 이유도 명확해진다. 글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성찰과 수렴 능력을 키우는 데는 최고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귀족들이나 조선의 선비들이 왜 문장력으로 인재를 선발했는가를 환기해 보라. 언어를 창조하고 조직하는 능력 없이 지성의 근육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고미숙' 그리고 명상




그래서 몸이 아픈 사람은 먼저 신체일지를 쓰는 게 좋다. 어떻게 아픈지, 아픔의 경과가 어떤지, 약에 대한 반응과 심리의 경로까지······. 그러면 자연히 일상의 모든 사항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된다. 아마도 자신의 몸이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게 느껴질 것이다. 마음이 아픈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의 행로를 세삼하게 추적해 보라. 이 감정과 의식, 무의식들이 대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를, 그 디테일에 서사적 육체를 입히는 것이 글쓰기다. 전자가 구슬이라면 후자는 그 구슬을 꿰는 실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다양한 병증과 통증을 체험했다 해도 그것을 꿸 수 있는 서사적 능력이 없다면 진정한 통찰력을 불가능하다. 글쓰기란 이 통찰력을 터득하는 최고의 방편이다. 


이런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칼 구스타프 융이다. 융은 프로이트의 제자였지만 무의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그와 결별했다. 결별의 과정에서 그 또한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치유의 첫 단계는 내 안의 타자들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무의식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기 시작했다. 그러고 그것을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그것은 일종의 받아쓰기 작업이었다. 중구난방으로 펼쳐졌던 환상들이 언어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럴수록 융은 점점 안정되어 갔다. 이렇게 여섯 번째 노트를 완성할 즈음, 융은 받아쓰기를 멈췄다. 거기에는 오직 타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자신이 그간 프로이트의 이름만으로 살아왔듯, 그곳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는 없었다. 융은 타자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받아쓰기에서 번역하기로! 현실 속의 삶, 자신이 자기 힘으로 살아내야 할 삶, 그 삶의 문법으로 타자들의 이야기를 융합하기, 융은 새로운 노트에 그 융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융은 무려 4년간 이런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그의 치유 방법 중 한 가지로 이용된다. 







융의 진료실은 여느 진료실과 달랐다. 그곳에는 반쯤 누운 상태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편안히 받아들이도록 고안된 환자용 의자도, 그 뒤에서 환자를 은밀히 관찰하는 의사용 의자도 없었다. 대신 의사와 환자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뿐. 그 의자에 앉아 융은 그저 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융은 의사로서 말하는 대신 환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병의 문제부터 치유 단서까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병의 심판자로서, 치유의 구원자로서 의사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융은 알았다. 의사와 환자는 병이 던져 준 수수께끼를 함께 푸는 놀이의 참가자였다. 거기서 길을 만드는 것은 환자의 몫이었고, 의사는 조력자일 뿐이다.

신근영「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 : 칼 구스타프 융



편작의 형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편작에서 융까지, 치유본능에 충실한 의사들의 전언은 한결같다. "병을 만드는 것도, 그 병에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이 기나긴 여정을 이끌어준 우리들의 멘토인 허준의 전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정기신의 발현이자 존재의 원초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김상욱 교수는 '우주는 떨림'이고 '인간은 울림'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김 교수의 언어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울림'과 '떨림'은 어떤 관계일까?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자 정신적 스승이라고 하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유명 작가이자 고전평론가인 '고미숙'의 책에는 어떤 울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보다 정확히 말하다면 '울림을 받는것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저자의 언어에는 떨림이 있어서 나는 그 떨림을 지극한 주관적 울림으로 느끼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나의 울림이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김상욱 교수의 소박한 떨림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지금, 나 역시도 미지의 타자에게 소박한 떨림으로 다가가고 싶은 순간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고미숙' 그리고 명상



자기로부터의 혁명 1
국내도서
저자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권동수역
출판 : 범우사 199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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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국내도서
저자 : 고미숙(Ko Mi-Sook)
출판 : 그린비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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