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읽고, 위빠사나 명상 61일차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중에서,,

술이 보약


  결혼한 이래로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주정하는 남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온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20년 동안 '제발 우리 남편 술 끊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고, 이제는 술만 봐도 독약으로 보일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술 마시는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인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보살님, 오늘부터 매일 아침에 108배 하면서 '부처님,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리고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이니 지금부터 술을 잘 챙겨 먹여야 합니까, 안 먹어도 됩니까?"

  "잘 챙겨 먹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에게 술상을 잘 차려주세요."


  그래서 이 부인은 그날 이후로 제 말대로 술상을 차려내기 시작했는데, 막상 술상을 받은 남편은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이 여자가 절에 가더니 미쳤나?' 하고 욕만 하더랍니다. 보통은 이렇게 한 사흘쯤 하다가 남편이 험한 말을 하면 '그래 내가 미쳤지, 내가 처음부터 저 인간은 안 될 줄 알았다' 하면서 그만둬버립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108배 기도를 해야만 그런 고비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 부인은 꼬박 한 달을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술은 무조건 나쁜 거다, 술을 안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고, 남편이 술을 먹고 와도 별로 문제 삼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남편이 술을 많이 먹고 온 날은 술상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조금씩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겁니다. 남편이 술을 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내 마음은 편안해지고 가정의 불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 달이 될 즈음 그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스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드디어 술을 적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보살님, 요즘 수행 안 하시는군요."

  "아닙니다. 스님. 수행을 더 많이 합니다. 요즘 제가 기분이 좋아서 매일 300배씩 합니다."

  "아니, 요즘 수행 안 하시네."

  "스님, 수행 잘한다고 칭찬은 못 해주실망정 왜 자꾸 나무라기만 하세요."

  "그렇게 하는 건 수행이 아닙니다. 지금 기도 잘못하고 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두세 달 지난 뒤 그 부인이 또 저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남편이 다시 예전처럼 술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읽고, 위빠사나 명상 61일차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남편이 술을 많이 먹는다고 괴로워하고 술을 적게 먹는다고 좋아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 마음이 술 먹는 남편에게 꺼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술을 적게 먹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도 아직도 내가 남편이 술을 마시지 말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를 더 많이 하면 남편이 더 빨리 술을 끊을 것이라는 기대로 매일 300배씩 절을 했지만 막상 남편이 내가 원하는 만큼 바뀌지 않으니 짜증이 났겠지요. 그 짜증을 남편에게 풀어댔을 테니 남편은 스트레스 때문에 전보다 더 술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괴로움이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집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게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그 마음만 놓아버리면 남편이 술을 더 먹는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없고 덜 먹는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처음 기도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은 남편이 술을 덜 먹어서가 아니라 남편이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내 생각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흥부는 제비 다리를 치료해 줄 때 작은 생명이 소생하는 모습에 기쁨과 행복을 느꼈을 뿐,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부자가 되는 행운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이고, 그런 복은 재앙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에 집착하면 놀부처럼 성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제비의 보은으로 얻는 보물보다 제비의 아품을 자기 것으로 어루만지는 마음 자체가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푸는 마음 자체가 이미 기쁨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자꾸 다른 보상을 구하다 보면 좋은 일을 하면서도 행복은커녕 오히려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보살은 남편에게 술상을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마음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술상을 차려주는 대가로 남편이 술을 끊게 되는 기쁨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보살의 마음이 아닙니다.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복을 구하는 놀부의 심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술이 보약'이라는 말은 남편을 나한테 맞춰 바꾸려 하지 말고 남편 입장에서 그를 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술상을 차려주는 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명상 61일차>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는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읽고, 위빠사나 명상 61일차



  상相이란 나다·너다, 깨끗하다·더럽다, 좋다·나쁘다 등등 마음에서 일으켜 모양 지은 관념을 말합니다. 생각으로 지었지만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모양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 등의 구별은 다 한 생각 일으켜 모양을 지은 것입니다. 흔히 뱀을 보고 징그럽다 하고 돼지를 보고 더럽다고 하지만 실제로 뱀이나 돼지가 그런  성질을 가진 건 아닙니다. 내가 한 생각을 일으켜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 존재가 정말 그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나'라고 하는 상, '너'라고 하는 상, '제도하는 자가 있다'는 상, '제도를 받을 대상이 있다'는 상, '제도를 해야 한다'는 상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이 있는 한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이 허망한 줄 알고 상을 여읠 줄 알아야 보살입니다.


  아상我相은 남과 구분된 나라는 조냊를 고집하고,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말할 것 없고 부부나 부모 자식조차 같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아我)으로부터 다시 두 가지 망상이 일어납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아소我所)과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아집我執)입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은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남편이 술을 마셔서 괴롭다던 부인은 술은 나쁜 것이라는 자기 견해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인에게 술이 보약이라고 생각을 바꾸라고 한 것은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고집을 버려야 상대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아상에 빠진 사람은 수천수만의 그물코 가운데 오직 한 코만을 잘라 '이것이 그물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한 그물 코만 가지고는 그물이 될 수 없듯이 아상에 빠져 있으면 실제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늘 실상과 동떨어진 세계관에 빠져 살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에 대한 개념을 아상이라 한다면 영혼에 대한 개념을 인상, 존재에 대한 개념을 중생상, 생명에 대한 개념을 수자상이라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위 범위를 구분 짓는 경계에 따라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아상,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인상, 생명과 무생명을 구별하는 중생상,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는 수자상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다른 것과 구별되고 변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모두 상이 됩니다. 실제 세계에는 다른 것과 구별되며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존재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어떤식으로 구별하든 그것은 다 생각이 만들어 낸 하나의 상일뿐입니다.








법륜스님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종교인이자 작가중 한 명입니다. 책과 강연으로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시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면서 고민도 해결 해 주시고 계십니다. 충분히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법륜스님도 결국 한 명의 종교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문득 스치는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부정적 감정의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감적 거부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도 제가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종교가 있어야 하는 이유,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뇌로 하는 이해는 진작에 끝났을 겁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나'라고 하는 '자아'의 실재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말도 참 웃깁니다. 자아가 있든 없든, 자아가 있기는 하지만, 자아 너머에 '참 나'나 '참 자아'가 있다는 것이 종교를 믿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요. 나는 또 왜, 자아의 존재 여부를 세상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정리가 되면 그때 다시한번 같은 주제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여하튼 현재, 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현대 신경과학의 근본적인 가정이 '의식은 물질의 산물, 즉 뇌의 산물' 이라는 것 같습니다. 의식이 뇌와 마음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난다고 믿는 저로서는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는 추측이라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 가정으로서만 끝나지 않고 사실로 밝혀진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허무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뇌의 멸(滅)이 곧 의식의 멸(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아'든, '참자아나 신성'이든 간에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몸 안에서 혹은 외부에서 세상과 우주에 의존하고(관계되고) 있는 이상, 의식은 뇌(몸)와 소통은 할지언정 구속되어 생멸生滅을 함께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법륜스님이 말씀하신 '생각'이라는 것은 대부분 '좌뇌'에서 이루어 집니다. 좌뇌의 주된 역할이 해석과 신념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한 마디로 좌뇌는 해석장치를 항상 켜 놓고 있으면서 공간 안의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합니다. 그러고는 거기서 어떤 의미든 뽑아내려 애씁니다. 지각능력을 동원하고 분류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일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고정관념과 편견, 선입견, 개념, 신념(잘못된 신념마저도) 등은 모두 좌뇌의 작품입니다. 이것들이 좌뇌의 가장 큰 특기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저와 여러분,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생각이 좌뇌의 작품이며, 좌뇌의 모든 작품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개념과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좌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좌뇌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좌뇌를 너무 의지하거나 신임해서는 안됩니다. 매사에 범주적으로 접근하는 좌뇌보다는 좀 더 전체적이고 세상을 하나의 연속체로 인식하면서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우뇌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고 활용법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깊이 이해하고, 개별적인 부분이 아닌 모든 부분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있는 그대로 감지해 내는 우뇌를 잘 활용한다는 것은 '통찰적 사고'를 한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찰력을 함양하는데는 명상이 그만입니다.(기승전'명상^)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읽고, 위빠사나 명상 61일차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국내도서
저자 : 법륜
출판 : 정토출판사 20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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