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명상 40일차, 법륜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를 읽으면서······.





어느덧 명상 40일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제게 스승이 계서서, 그 스승으로부터 "잘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한, "그렇다면 열심히는 하고 있느냐?"고 여쭈신다면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또, "열심히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어 오신다면 "믿는대로, 배운대로 그저 행할 뿐입니다."라고 답변 드릴 것 같습니다.


  그저 하고 있습니다. 밥 먹고, 똥 싸고, 일 하고, 독서 하듯 인간이 생존을 위해 행하는 것들, 가치 있다 여기며 노력하는 일들과 다름없이 김찌에게는 '명상'이 필요한 일이기에, 그저 묵묵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말이기에 두, 세 차례 시간을 배분해서 가급적 많은 시간 동안 명상 할 것입니다. ······


  삶은 '현재'들의 모음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쌓여 한 덩어리를 이룰 때, 우리는 그것을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순간순간이 모두 인생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 순간을 살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이 순간에만 스스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기억'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겨우 인지할 수 있을 뿐이며, 미래는 '생각이나 영감'에 의존해서 그려볼 수 있는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머물면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는 '이 순간의 나' 일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이 '이 순간' 뿐이라며, '지금'을 강조하는 김찌가 현재 글을 쓰고 있고, 잠시 후인 그때의 '지금'에 명상을 한다는 것은 제 삶에서 글쓰기와 명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순간 '무엇'을 할 때, 그 일이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사회적 시각을 차단해야 합니다.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을 행할 때만이 가장 자신스러운 삶을 완성하는 계기로 작동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도 이 순간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하며 새로운 우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매 순간 바뀌는 생각과 감정, 느낌 등은 우리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들과 나를 구성하는 몸과 마음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각각의 '나'는 세상이 말하는 불변의 관념, 통념, 이념, 이론, 관습 등과는 애초부터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럴진데 우리는, 그것에 얽매여 무지(無知)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를 발휘하면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발맞춰 스스로 새로워 지고 매 순간 쇄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회적 시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개척해 나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참 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하 이어지는 글은 법륜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입니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진지하게 사유하는 여러분들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원문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명상 40일차, 법륜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를 읽으면서······.



법륜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

책을 접으며 <어떻게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것인가>


  어느 학생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 질문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불렀습니다.

  "질문이 뭐냐?"

  "스님은 왜 봉사합니까?"

  "네 어머니가 가게를 한다 치자.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너더러 주말에 가게 좀 봐달라는데 너는 여자 친구하고 놀러가게 되어 있어. 그러면 일요일에 가게 가고 싶을까, 가기 싫을까?"

  "가기 싫죠."

  "그럼 '가게 갈래, 여자 친구하고 놀러 갈래?' 하면 어느 거 할래?"

  "놀러 가죠."

  "그러면 어머니가 가게 봐달라는 게 귀찮은 일인가, 아닌가?"

  "귀찮은 일이죠."

  그래, 그래서 친구하고 어울려서 놀러 갔다 하자. 그런데 한 달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자,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생각해 보니 친구하고 놀러간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겠니, 친구하고 놀러 가지 않고 엄마를 도와주는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겠니?"

  "그야 엄마를 도와주는 게 잘한 일이겠죠."

  "그래. 한 달도 못가서 생각이 달라졌지? 한 달, 1년, 나아가 10년이고 20년 뒤에 돌아봤을 때 어느 것이 내 인생에 이로월까를 생각해야 해. 어머니를 도와주는 것은 어머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더 나은 일이야. 봉사도 그렇다."

  

  봉사라는 것은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그 전에 나에게 더 큰 이익이 됩니다. 길 가다가 넘어지는 애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과 길 가다가 어린애의 발을 걸어서 일부러 넘어뜨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에게 이로울까요? 아이의 입장은 놔두고서라도 일으켜 세워주는 편이 나에게 이롭습니다. 뿌듯한 기쁨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뿌듯하니까요. 그런데 아이에게도 이로우니 더 좋지요. 그래서 우리가 보시하고 봉사하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일은 나에게 좋은 일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정진하는 것은 나에게 좋은 일이에요. 정신차리고 사는 것은 나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한테 좋은 일을 안 하고 외면합니다. 달콤한 음식은 혓바닥에는 즐겁지만 몸에는 나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혓바닥의 맛에 집착하면 혓바닥에 좋은 음식만을 먹어 몸에는 나쁜 겨로가가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다음나 후회하게 되지요. 술은 목으로 넘어갈 때 즐겁습니다. 당장 술마시는 오늘 저녁에는 기분이 좋아요. 그러나 내일 아침에는 괴롭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만 들여다봐도 내생이 보이는데 굳이 내생 이야기 꺼낼 것도 없어요.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수없는 생을 고통 속에서 윤회전생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니 이런 허깨비 놀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죽은 뒤 천당 가니 극락 가니 하며 어떤 추상적인 걸 탐구하라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나는!" 하고 살았지만 "네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합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내 거야!" 하고 살았는데 "왜 네 것이니?" 하고 물으면 모릅니다.

  이념과 이론, 관습과 습관, 사상과 관념에 사로잡혀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 인식하는 것은 애초에 산길을 잘못 접어든 것과 같습니다. 생각을 잘못해서 인생을 살기 대문에 인생이 피곤해요. 그래서 그렇게 노력을 해도 죽을 때까지 자기 인생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남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립니다. 남편, 자식, 세상에 매달리다가 안 되면 하느님, 부처님에게 매달립니다. 그렇게 하느님, 부처님께 빌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한 생각만 돌이키면 내 인생의 문제는 끝나버립니다. 애초에 빌고 도움을 요청할 일이 없어져요. 그 다음부터는 하는 일 마다 한가해집니다. 남 돕는 일밖에 할 일이 없거든요. 남을 도와야 한다는 게 아니라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남을 돕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제 일에 바빠 남을 데려와 자기 일을 시키지만, 자기 할 일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남의 일을 거들어주게 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그것을 복잡하게 해결하려다 보니 머리가 허옇게 셀 때까지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수행자들의 의식주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셨어요. 음식은 남이 먹다 남긴 것을 얻어먹고 옷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이나 동구에서 자도록 했더니 평생 의식주 해결하는 데 허비할 시간으로 남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옷을 예로 들어볼까요? 수행자는 옷 한 벌로 잠옷, 외출복, 법복을 두루 삼습니다. 색도 모양도 하나뿐이니까 무엇을 입을까 고르면서 시간 보낼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진 옷의 개수와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입할 돈을 버느라 시간 보내고, 가서 고르고 사느라 시간을 보내고, 아침마다 옷장에서 골라 입느라 또 시간을 보냅니다. 화장하고 음식을 먹고 잠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라 일해 벌어서 집 사고 가구 사느라 다 사용합니다. 또 술마시고 담배 피고 잡담하고 골프치고······. 이렇게 보냅니다. 그런데 저는 술 마시고 잡담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하나도 없어요. 사람들은 저한테 어떻게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묻습니다. 100시간 중에 많은 시간을 먹고 입고 노는 데 쓰는 사람과 100시간을 대부분 다른 사람 돕는 데 쓰는 사람이 하는 일을 비교하면 그만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요.


  담배 피우는 사람더러 담배 끊으라고 하면 담배 피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겠지요. 그렇지만 부처님이 심술이 나서 여러분 좋아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비싸고 좋은 담배도 피우는 것보다는 안 피우는 것이 몸에 훨씬 좋습니다. 몇 백 달러짜리 술을 마셨다고 자랑들 하지만 마시지 않는 것이 건강에는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 살 돈 번다고 시간을 보내고, 기껏 번 돈으로 건강을 해치느라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그 건강 회복한다고 또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사니 자기를 위해서도 시간이 늘 부족하니까 부처님, 하느님까지 끌어들여서 자기 일 도와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렇게 인생 복잡하고 힘들게 사는게 우리 중생입니다.


이어지는 글은 41일차 명상에서······.



<명상 40일차>

  



명상 40일차, 법륜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를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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