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명상 33.34일차<위빠사나 알아차림, '빤야띠'와 '빠라마타'>





『아는 마음, 모르는 마음_황영채』에서


성품으로 말하기 

살아 있는 현재의 사악도는 첫째, 현재 끊임없이 욕망과 집착으로 괴로워한다면 살아 있는 아귀다. 둘째, 미워하는 마음과 화내는 마음을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 살아 있는 지옥이다. 셋째, 마음이 꽉 막히고 우매하게 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짐승의 삶이다.

 

두 손바닥을 대고 있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손바닥이라는 하나의 명칭과 대고 있다는 모양새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따스하다혹은 단단하다고 하면 두 손바닥이 마주 닿아 있을 때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고 그 느낌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이야말로 실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에 병이 나거나 통증이 있을 때에 아프다로 받아들이면 병이나 통증이라고 하는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몸이 뜨겁다, 차다, 무겁다와 같이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성품으로 보는 것이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에도 단단하다. 부드럽다, 수축한다, 팽창한다, 따뜻하다, 가볍다, 무겁다, 뻑뻑하다등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모양이나 명칭이 아니라 호흡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모양이나 명칭 혹은 관념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성품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실재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니렇게 대상을 모양, 명칭, 관념으로 보는 것을 빤냐띠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상을 빤냐띠가 아닌 빠라마타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수행의 질이 향상되고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빠라마타를 궁극적 진리라고도 하고 법(法)이라고도 한다이와 같이 오직 몸과 마음이 대상에 부딪쳐서 생기는 것, 몸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 이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빠라마타'로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용만 충실하다고 해서 다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형식도 필요하고 기본적인 규칙이나 예절도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 계율도 필요하고 단정한 옷차림도 필요한 것이다. 다만 모든 대상을 오직 빤냐띠만으로 보지 않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빠라마타인 성품으로 볼 때 우리는 나라고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겉모습에 빠지지 않고 성품으로 대상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학생들 앞에서 강의할 때는 선생님이다. 그러나 강의실에서 나와 길거리로 나서면 행인이 된다. 그러다가 어느 상점에 들어가서 성냥을 살 때는 그 상점의 고객이 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한 사람의 남편이자 애들의 아버지가 된다. 그렇다면 어는 것이 진짜 나인가?”

 

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우리는 그것이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포에 내놓은 사과는 상품일 뿐이고, 화가 앞에서는 오직 정물일 뿐이다. 또한 사과의 속을 도려내여 술을 따라 마신다면 이때의 사과는 대용 술잔일 뿐이다. 부처님은 이미 행주좌와(臥) 모두가 수행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아니, 수행의 대상 자체가 바로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움직이고 느끼며 생각하는가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들은 변하는 것이고(無常), 괴로운 것이며(), 내 뜻대로 안되는 것(無我)이라는 3가지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과는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에서 우리는 사과의 본질이나 실체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없다. 본질이나 실체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실체 없음이 바로 빤냐띠의 부질없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과를 빤냐띠로 보면 없는 것이다. 사과를 오직 먹는 것이라고만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정물이나 대용 술잔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것들이 다 사과를 관념으로 본 것들이다. 아니 사과라는 이름조차도 영오로는 apple이고 독일어로는 Apfel이다. ‘사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과의 모양이나 명칭, 관념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모양이나 개념 혹은 명칭으로 그 실체를 찾으려고 하면 없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나란 존재의 빤냐띠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스님들이 항상 참나를 찾으라고 하는 것도 바로 나라는 존재를 빤냐띠가 아닌 빠라마타로 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명상 33.34일차<위빠사나 알아차림, '빤야띠'와 '빠라마타'>



통증은 1단계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1단계 통증은 방금 상처가 난 상태를 말한다. 2단계 통증은 그 상처에 염증이 나서 1차 감염이 된 상태이고, 3단계는 그 염증이 오래가서 상당히 괴로워하는 상태다. 그리고 제4단계는 온통 하루가 이 통증으로 찌들어 고질병이 되어버린 상태다. 날이 흐리면 삭신이 쑤시다고 하거나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의 경우가 4단계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의사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통증은 제1단계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때는 이 말의 의미를 몰랐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느낌의 세 가지를 말하려 한 것이다. 1단계 통증이 아름다운 이유는 느낌 그 자체로 그치고 육체적 내지 마음의 고통으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명상 33일차>



명상 33.34일차<위빠사나 알아차림, '빤야띠'와 '빠라마타'>


<명상 34일차>



일할 때의 나, 밥먹을 때의 나, 잠잘 때의 나, 화장실에서 볼일볼 때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요? 일할 때의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일하는 나'를 아는(보는) 것이고, 밥먹을 때의 나를 보는 사람은 '밥먹는 나'를 아는(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잠잘 때의 나와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의 나를 아는(보는) 사람은 당시 내 모습을 아는(보는) 것일 겁니다. 이때, 그들이 보는 내가 '진짜 나'일까요? 그들이 보고 있는 존재가 모두 '나'라면, 내가 여러가지 경험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러가지 경험을 하는 존재가 모여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것일까요? 





명상 33.34일차<위빠사나 알아차림, '빤야띠'와 '빠라마타'>




누가 어떤 경험을 하든, 그것을 보는 사람과 하는 사람은 여러모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 차이를 좁히기 위해 추측과 예상이라고 하는 생각도구를 사용해 보지만, 결과는 허무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각도구는 '착각과 선입견'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기억, 즉 무의식에 뿌리 박힌 고정된 관념과 개념으로는 그 어떤 진실에도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 실수를 하고, 생각이 짧았다고 느끼고,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 또한 너의 착각일 분아야"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다 지혜로워지길 바라고, 현명한 선택을 통해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고정관념과 개념,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한 결코 진리에 다가갈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경험이 이러했기 때문에 저 사람도 '이런' 경험을 하고 있을꺼야!. 이런 상태일꺼야!'라고 단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추측하고 예상하되 올바로 해야 합니다. 물건이건 사람이건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내재된 마음과 생각을 알고, 이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인간을 포함한) 것의 모습과 형상, 형태는 그것의 본질이 아닙니다. 대상의 성품을 보려는 노력만이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근본적으로 본질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본질을 보려는 노력'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명상 33.34일차<위빠사나 알아차림, '빤야띠'와 '빠라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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