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깨나마의 명상 23일차' <위빠사나 명상과 명상에 대한 오해 6가지>





진리(Dharma)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입구가 언제 어디서 우리 앞에 나타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챙김 명상에서 처음 느꼈던 명쾌함과 감사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진리가 가진 치유의 힘과 변화 가능성을 접하는 것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지만,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온전하게 만나게 되고 삶과 마음이 진정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게 된다. 《어려울 때 힘이 되는 8가지 명상_잭 콘필드



<깨나마의 명상 23일차.1>


명상에 대한 오해들 《위빠사나 명상_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


오해 1. 명상은 일종의 이완법일 뿐이다.

- 여기서의 관건은 '뿐'이라는 단어다. 물론 이완이 명상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위빠사나 명상은 훨씬 고원(高遠)한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위빠사나는 다른 목표, 자각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집중과 이완은 자각을 위한 필수 부속물이다. 그것은 필요한 선행 요소이자 편리한 도구, 유익한 부산물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통찰력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일상생활의 정화와 변신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심오한 종교적 수행인 것이다. 


오해 2. 명상은 몽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 이 또한 위빠사나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다른 몇몇 명상체계들에는 정확히 부합되는 진술이다. 통찰명상인 위빠사나는 최면 형태가 아니다. 무의식 상태가 되기 위해 정신을 잃지 않아도 되고, 감정 없는 식물 상태가 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굳이 관련을 시킨다면,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할 것이고,  훨씬 더 명확하고 엄밀하게 자신에 대해 깨달을 것이다.

  위빠사나를 정의하면 알아차림(mindfulness) 혹은 자각(aware-ness)을 일궈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위빠사나 체계에서 사용하는 이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당신이 명상을 하다가 몽환지경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명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처럼 단순하다.


오해 3. 명상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수행법이다.

- 명상은 상징적인 사고보다 더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의식 수준을 다룬다. 그러므로 명상에 관한 어떤 자료들은 말로 옮기기에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해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뭔가를 이해하는 데는 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방법도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걷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걷기 과정에서 신경섬유와 근육이 수축되는 그 정확한 순서를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걸을 수 있다. 명상도 이런 식이다. 그래서 직접 그것을 해보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명상은 예측할 수 있는 결과를 자동으로 제공하는 무미건조한 공식이 아니다. 특정 수행 과정 동안 정확히 뭐가 나타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탐구이자 실험이고, 매번 일종의 모험이다. 사실 이것은 그야 말로 진실이어서, 수행 중에 예측 가능성과 동질성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것을 일종의 척도로 삼아도 좋다. 말하자면 그런 상태는 당신이 궤도를 이탈해서 정체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위빠사나 명상의 본질은 매순간이 이 우주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순간인 듯이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해 4. 명상의 목적은 영적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 아니다. 명상의 목적은 알아차림을 키우는 데 있다. 독심술이나 공중부양이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해탈이다. 명상가로서 영적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특별 수행을 해도 좋은 단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선보다 훨씬 깊은 지점에서 일어난다. '선'이라는 아주 깊은 경지에 이르고 나면, 명상가는 그 영력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어나거나 자신의 삶을 집어살킬 위험성 없이 그런 능력을 발휘할 만큼 충분히 숙달된 경지에 이른다. 그러고 나면 오직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만, 그 능력을 발전시킨다. 이런 경지는 대개 몇 십년씩 수행하고 난 다음에나 이러나니 염려하지 마라. 초심자들의 경우에는 자각을 더 많이 키우는 데에만 집중하라. 어떤 음성이나 영상이 별안간 떠오르면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고 흘려보내라. 거기에 얽매이지 마라.



'깨나마의 명상 23일차' <위빠사나 명상과 명상에 대한 오해 6가지>



오해 5. 명상은 위험하니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피하는 게 좋다. 

- 뭐든 다 위험하다. 길거리를 걷다가 버스에 치일 수도 있고, 샤워를 하다가 목이 부러질 수도 있다. 명상을 하다 보면 그물이 물밑을 훑듯 과거의 온갖 불쾌한 일들이 새삼 떠오를 수 있다. 오랫동안 뭍혀 있던 그 억압된 소재들이 당신을 두렵게 할 수 있다. 그래도 이건 꽤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인 건 확실하다. 전혀 위험하지 않은 행동이란 없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누에고치같이 보호막을 덮어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사는 게 아니라, 미리 죽어버린 것이다.

  위빠사나는 자각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것 자체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향상된 자각은 위험을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제대로만 한다면 명상은 매우 온건하고 점진적인 과정이다. 


오해 6. 명상은 성자나 성인을 위한 것이지, 범인(凡人)에게는 걸맞지 않다.

 - 우리는 명상가라면 입안의 버터조차 감히 녹지 못할 정도로, 경건한 모습이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러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약간만 접촉해보고 나면 그런 환상은 금새 떨쳐버릴 수 있다. 대신 그런 사람들은 대단한 정력을 가지고 놀랄 정도로 원기 왕성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부분의 성자들이 명상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성자이기 때문에 명상을 하는 건 아니다. 그 반대다. 명상을 했기 때문에 성인이 된 것이다. 명상이 그들을 그런 자리에 있게 한 것이다. 그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명상을 시작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깨나마의 명상 23일차.2>



'깨나마의 명상 23일차' <위빠사나 명상과 명상에 대한 오해  6가지>



<깨나마의 명상 23일차.3>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김찌는,

아! 여기에서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말는 소주의 맥주, 기타 술을 조금만 마셔도(타자와 비교해 현저히 적은 양) 속이 매스껍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사실은 얼굴 뿐만아니라 몸 전체가 그러함), 머리가 빨리 아파오기 때문에, 제 스스로 '술이 약하다. 잘 마시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몸에서 술이 잘 안받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김찌가 갈수록 술을 멀리하는 이유, 정말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정신의 몽롱함'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하게 되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수가 따라옵니다. 밤새 술을 많이 마시고 잠든 다음 날 아침, 무엇이든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면 그건 지난 밤 술에 취해 수치심을 느낄 만한 말과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설사 수치심이 따라올 만한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깨끗하거나 오롯하지 못한 정신이 불쾌감을 줍니다. 


오늘 날 제가 명상을 통해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정신이 맑게 깨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떤 불쾌함이나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명상은 알아차림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앉힘으로써 육체와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과 정서를 알아차리기 위한 자기 수행인 것이죠. 술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김찌도 과거에는 술을 좀 마셨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때 친구들이나 여자 친구들, 무엇보다 지금의 아내와 술을 마시면서 느꼈던 감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때는 나의 정신상태를 들여다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쾌감과 불안감 같은 정서가 비집고 들어올 틈 조차 허용되지('허용하지'가 아닙니다. 의식 할 필요조차 없이 무의식 상태에서 모든게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않았습니다. 완전히 '현존의 상태'였던 것이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김찌는, 인간은 자기 만족을 경험한 이후에나 타자에게 관심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만족스러운 경험,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욕구와 욕망이 충족된 상태에서만 비로소 타자와 사회에 눈을 돌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제 자신이 어떤 마음과 모습으로 삶을 살고 있는지,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이고, 진정으로 어떤 삶을 추구하려는 것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관심, 타자에 대한 헌신은 '가련한 에고'의 욕망이지 현존 상태의 '참 나'의 본질은 아닙니다. 우주에 있고, 여기 저기에 있으며, 내 마음 너머에 있는 '참 나''참 자아'는 현재를 살면서 세상 만물과 공명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김찌의 알아차림 명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깨나마의 명상 23일차' <위빠사나 명상과 명상에 대한 오해 6가지>



위빠사나 명상
국내도서
저자 :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 손혜숙역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200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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